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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 Posted by 크리스천 위클리 05/19/17
“요한 웨슬리의 발자취를 따라서” 참가 후기
미주웨슬리 부흥전도단 주최/크리스천 위클리 주관
런던에 있는 웨슬리 채플의 웨슬리 동상앞에서

금년 2017년은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해로서 개신교도들에게는 뜻깊은 해이다. 앞서간 개혁자들의 신앙과 삶을 되돌아 보고 현재의 개신교의 신앙을 새롭게 조망해 보는 것은 시대의 요청이며 또한 의무라고 여겨져 이번 동북부지역의 웨슬리 부흥단 주최로 이루어진 ''요한 웨슬리 목사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성지순례에 참여하게 되었다.

요한 웨슬리에 대한 나의 개인적인 기억이 하나 있는데,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고 겁없이 감리교 신학대학에 들어갔을 때 나는 21살이었다. 그 때 나는 감신의 본관 건물의 3층이 도서실이었는데 그 도서실 중앙에 걸려있는 요한 웨슬레 초상화와 한참동안 마주하고 내려오곤 하였다. 백발의 긴 머리에 한손에는 성경책을 들고 있었고 약간 내려쓴 안경 넘어로 나를 바라보는 눈매가 매우 자비로우면서도 매섭고 마주할 때마다 철없는 신학생이었지만 인생의 힘든 결단을 하고 목회의 길에 찾아 온 내게 뭔가 말씀을 들려 주는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로 200년 후의 감리교도로서 요한 웨슬레 목사님의 삶과 그의 목회 현장을 돌아보는 것은 상당한 기대와 흥분 그이상이 아닐 수 없다.

 
한편으로 나는 Calvin의 하나님의 절대주권의 예정론을 부정하지도 않고 그 예정론이 웨슬리가 말하는 하나님의 선재적 은총이나 인간의 자유의지와도 대립되는 개념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한국의 대다수 기독교인들은 교파간에 구원에 대한 잘못된 해석과 적용으로 교회 성장은 정체되었고 때로 수동적이고 기복적이고 무책임한 신앙인들을 양산하게 되어 그결과 오늘날 개신교회가 사회의 많은 지탄을 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나는 감리교도의 한 사람으로서 평소에 가지고 있던 목회소신이 있다. 21세기 개신교 목회현장의해답은 웨슬리의 Methodist Movements 와 그의 창조적 목회원리에서 찾아야 한다는 나름대로의 소신이다. 나는 그것을 이번 성지순례현장에서 찾아 보고자 하는 것이다.

웨슬레 목사님의 목회사역은 감리교 성결교 구세군 등 그의 신학에 뿌리를 두고있는 교단뿐 아니라교단을 초월하여 대부분 그가 지향했던 평신도 사역원리(제자훈련) 영성훈련 Social Gospel 운동이나 소구룹운동 (속회)등등 그의 다양한 목회 사역의 원리를 따르고 있다는 점에서 17세기 당시 영국사회에 스티븐슨의 증기기관차 발명이 근대 산업혁명의 시발점이 되었던 것처럼 그의 창조적 목회사역이 종교개혁이후 개신교회의 목회사역의 초석이 되었으며 그의 목회 사역의 다양한 용어들 원리와 방법론 등은 르네상스 시대의 미켈란제로의 예술성과도 견줄만큼 창의적이고 독창적이라 할 수 있다.

이번 성지순례를 통하여 웨슬리의 생애와 사상 모든 분야를 다 섭렵할 수는 없기에 요약해서 4가지 분야로 나누어 그의 생애와 사역을 조망해 보고자 한다. 첫

째 웨슬레의 신앙의 DNA에 대하여 두번째 Oxford 대학의 뜨거운 신학적 논쟁과 토론, 세번째는 목회사역의 창조성과 그원리의 발명가로서의 웨슬리, 그리고 네번째 브리스톨의 New Room 정문앞에 말을 타고 있는 웨슬리의 동상, 즉 웨슬리뿐 아니라 감리교회의 영원한 아이콘(I-Con)으로 ''세계를 향하여 말을 타고 달려가는 웨슬리''로 나누어 성지순례의 의미를 되새겨 보고자 한다.

 

첫번째 웨슬레의 신앙의 DNA는 무엇일까?

 

영국이라는 한 나라만이 아니라 17세기 한 시대를 움직인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이 들어 쓰신 사람,성령의 사람이 태어난 곳은 어떤 곳일까? 산세가 좋은 곳일까? 한국식으로 풍수지리가 좋은 명당자리에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개천에서 용이 난다는데 무슨 좋은 강이 흐르는 신비한 곳일까? 이런 나의 생각을 하고 있는 나를 순례버스가 도착하자마자 나를 당황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산수가 좋은 곳도 아니고 지리가 좋은 명당 자리는 더욱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버스가 멈춰선 곳은 어느 시골에서나 볼수 있는 아주 평범한 3층으로 된 빨간 벽돌 건물이었기 때문이다.

"여기가 쟌 웨슬리가 태어난 그의 아버지 사무엘 웨슬리 목사님과 수산나 웨슬리의 목사관 Old Rectory입니다." 가이드의 말과 함께 나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바빠지기 시작했다. 뭔가가 있을 것이다. 그것을 찾아내야 한다. 아직 그의 체취가 남아있을 것 같은 이곳에 숨겨진 웨슬리 목사님의 남다른 생애의 비밀 즉 그의 신앙의 DNA 같은것(?) 그것은 무엇일까? 나이가 지긋하신 안내자는 상기된 얼굴로 신이 난듯이 웨슬리와 그의 가족들이 쓰던 방이며 사진이며 괘종시계 침실과 부엌 3층의 어린 웨슬리와 찰스 웨슬리가 놀던 방들을 오르내리며 쉬지않고 설명한다.

그러다가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다가 복도에 걸려있는 한폭의 그림이 나의 눈길을 사로잡았는데, 1707년 그러니까 쟌 웨슬리가 5살 때 올드 렉토리를 전소시켰던 대형 화재사건을

그린 그림이었다. 쟌 웨슬리는 1703년 6월 17일 사무엘과 수잔나의 19자녀중 15째로 출생하였는데 한밤 중에 목사관에 불이나서 3층 난간의 불구덩이 속에서 어린 웨슬리가 울고 있었고 이 간박한 시간에 아버지 사무엘이 안절부절하고 있을 때 동네 사람들이 나아와 인간 사다리를 만들어 가까스로 불타는 불구덩이 속에서 웨슬리를 구출하는 장면의 그림이다. 어린 웨슬리가 불구덩이의 화염가운데 서 구출하고 있는 모습이 강조된 그림이다.

웨슬리는 장성한 다음에 어린 때의 이 사건을 간증하면서 자기 자신을 가리켜 ‘타는 불에서 건져낸 부지깽이(A brand plucked out of the burning)’로 간증하곤 하였다고 한다. 웨슬리의 부흥운동과 불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아마도 웨슬리의 사역의 불타는 열정은 곧 어릴 때의 이 ‘불구덩이/ 타나 남은 부지깽이’ 같은 그의 신앙의 DNA에서 출발한 것은 아닐까?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고 하셨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심오하고 인간으로서 이해하기 힘든 영적인 진리를 불로 표현하신 것이다. 주님의 영적인 진리를 아무리 인간의 말로 논리적으로 설명한다 해도 인간이 다 이해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그 진리는 말이 아닌 뜨거운 성령의 불로서 체험되고 받아 들일 때 비로서 우리 주님의 진리의 DNA가 우리 가슴속에도 박히게 되는 것이다.

이런 웨슬리의 어릴 때의 불의 경험이 올더스게잇(Oldersgate)에서 모라비안 사람들이 모여서 기도하고 성경을 읽을 때 성령의 불이 웨슬리의 가슴속에 타오르게 된 것이다. 이불은 인간의 냉정한 이성을 넘어서는 감성적이면서 인간의 내면에 역사하는 영적인 성령의 불이요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불인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웨슬리는 이 뜨거운 불을 전하기 위하여 말을 타고 평균 매년 4,500마일을 달리고 회심 후 일생동안 45,000번의 설교와 7만 명이상의 후계자와 294명의 순회설교자를 길러낸 것은 그의 내면에 이러한 보이지 않는 영적인 DNA가 그의 가슴속에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두번째 웨슬리의 Oxford 대학의 신학적 논쟁과 Holy Club

 

1720년 6월 24일 웨슬리는 당시 세계적인 젊은 수재들이 모이는 Oxford 대학교 크라이스트

처지(Christ Church, 당시에는 신학교가 따로 없었다)에 들어 갔다. 그는 매일 아침 5시에 기상하고 내적 성결을 위해 종교적인 명상을 갖고 매주 수요일 금식하고 독서에 심취하는 규칙생활을 훈련하였다. 옥스퍼드 대학에서는 매시간 종을 치는데 종칠 때마다 시편을 찬양하고 명상기도를 하였다. 이러한 개인적인 영성훈련과 신학공부만이 아니라 논리학 물리학 수사학과 시문학까지 공부하였다고 한다.

우리가 가이드를 따라 대학 캠퍼스 안에 제일 먼저 들어간 곳은 한 3-4백명이 앉아서 식사를 할 수 있는 커다란 식당(Dining hall)이었다. 들어가자 마자 우리를 놀라게 한 것은 식당 벽면을 화려한 인물들의 사진을 장식했는데 거기에는 이 대학 출신 영국의 왕들과 귀족들과 화려하게 빛낸 인물들의 사진이 걸려 있었고 맨 마지막 들어가는 입구쪽에 쟌 웨슬리의 사진도 걸려 있었다.

영국이 위대한 나라라는 것은 영토나 군대가 아니라 바로 세상을 빛낼 수 있는 위대한 인물이 있고 그러한 지도자들을 키워낼 수 있는 Oxford 대학이 있다는 것이 힘이 아닐까 생각했다.

여기서 웨슬리는 테일러(Jeremy Taylor), 토마스 아켐피스(Thomas a Kempis), 월리암 로(William Law)등 당시 훌륭한 지도자들을 통해서 지식을 넓히게 되었고 또한 좋은 신앙의 동지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감리교회를 태동케 한 그 유명한 Holy Club 멤버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웨슬리는

 

우수한 학생으로서 1726년 3월 17일 옥스퍼드 대학교 링컨 칼리지(Lincoln College) 교수(Fellow)로 선발되었고, 웨슬리는 링컨 칼리지에서 한 주제를 놓고 학생들로 토론하게 하고 자신은 토론의 심판관으로 대화를 이끄는 방법으로 가르쳤다고 한다.

나는 안내자를 따라 1546년 헨리 8세가 세웠다고 하는 고색 찬란한 켐퍼스를 돌면서 감리교회의 신학적 근간을 이루는 웨슬리의 신학과 사상이 바로 이곳에서 다양한 학문적 연구와 치열한 신학적인 토론을 통하여 숙성되고 체계를 갖추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17세기 영국 사회는 계몽주의 영향으로 자연과학자들, 코페루니쿠스(Nikolaus Kopernikus), 갈릴레이(Galileo), 뉴우턴(Newton)이 출현하여 기존의 종교개혁자들이 주장하는 성경의 우주관과 권위가 도전을 받는 시기였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속에 Holy Club의 당시 내놓으라는 명석한 젊은 신학자들이 하루 종일 먹고 자고 단순히 기도만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그들의 신학적 고민은 무엇이었을까? 종교개혁이후 그들이 매일 토론하고 싸웠던 신학적 논쟁점들은 무었이 었을까?

역사 신학자 아웃틀러(Albert Outler, SMU)에 의하면 웨슬리의 신학적 입장을 변증법적 제 3의 방법론으로 통합했다고 보았는데, 웨슬리는 개신교적인 전통위에 굳게 서서 개신교적 단점을 캐톨릭적인 장점으로 창조적으로 보완하고자 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더 나아가 계시와 이성, 칭의와 성화, 칼빈의 예정론과 웨슬리의 선행 은총등 모든 형태의 양극단의 주장들을 창조적으로 통합하고 새롭게 창조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웨슬리 신학의 가장 독특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사중 규범론(quadrilateral) 탄생하게 되었는데, 즉, 성서, 전통, 경험, 이성, 이 네가지가 상호 보완하고 서로 견제 의 기능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아직까지도 우리 연합감리교회의 장정에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연합감리교회 장정에 의하면, “웨슬리는 기독교 신앙의 살아있는 핵심은 성서안에 계시되었고, 전통에 의해 조명되었고, 개인적인 경험에 의해 생기를 얻었고 이성에 의해 확고해 졌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웨슬리 신학은 종교 개혁자들의 신앙을 바탕으로 성경의 권위를 우선시 하며 전통은 하나님이 과거에 역사하셨던 전통의 유산을 돌아보아 오늘의 신앙을 풍요롭게 하며 이성은 무분별한 열광주의 신비주의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며 체험은 극단적 이성 맹신주의로부터 뜨거운 열정의 신앙을 보전해 준 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경적 이해와 신학적 이론이 웨슬리의 목회와 신학에 골격을 이루게 되어 새로운 감리교단이 탄생하기에 이른 것이다.

 

세번째는 목회사역의 발명가로서의 웨슬리

 

나는 드디어 웨슬리가 본격적으로 사역했다는 웨슬리 채플에 도착하였다. 채플은 런던의 번힐필드(Bunhill Field) 라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채플 건물은 역사진실을 잔득 담고 있으면서 말없이 서 있는 박물관 같은 묵중한 느낌을 주었다. 우리는 고고학자들처럼 이 채플에 담겨져 있으나 200년 동안 말로 표현되지 않은 의문의 뜻을 찾아내고 발견해 내야한다. 그것이 웨슬리 후예 들이 해야 할 일이고 성지순례의 의미일 것이다.

정문에 들어서자 마자 정문에 서있는 웨슬리의 동상이 인상적이었다. 아! 내가 감신에서 엄숙히 비밀하게 존경하였던 그 웨슬리! 오늘도 왼손에는 작은 성경책이 들려져 있고 오른손으로는 뭔가 내게 가리키거나 설명하려는 것 같은 활동하고 사역하는 열정적인 웨슬리의 모습이다. 채플에 들어서자 마자 우리는 엎드려 기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여기가 200년전 웨슬리의 사역의 현장이구나 하고 눈을 감고 있으니 그의 단호하고 의지적인 설교가 들려 오는듯 하다.

그런데 안내자의 채플의 여러가지 장식들과 구조물등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는동안 내부를 둘러보다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200명도 채 들어갈 것 같지 않은 이 작은 교회에서 세계를 움직이는 감리교회가 태동하였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적어도 수만명을 수용하는 건물이나 힘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로 옆건물의 Wesley House 건물에 들어가 또한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웨슬리가 38년동안 사용했다는 사무실은 지금의 내 사무실 방보다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우리가 자랑하는 최신 컴퓨터나 셀폰도 없었다. 오직 낡은 성경책에 기도하는 의자가 전부였다.

이 작은 방에서 세계를 꿈꾸었다니! 이작은 방에서 “세계는 나의 교구다라고 외쳤다니!” 세계를 움직이는 힘과 비젼은 어디서 나온 것을까? 그 힘의 비밀은 무엇일까?

웨슬리는 단순히 앵무새같이 말씀만 반복하는 목회자가 아니었다. 나는 감히 그가 종교개혁이후 17세기 개신교 목회원리의 가장 위대한 발명가라고 말하고 싶다. 그가 세운 감리교회는 단순한 기구이거나 조직이 아니라 그의 깊은 기도와 말씀묵상에서 나온 정교한 영적인 Art요, 체계적, 조직적으로 만들어낸 영적원리의 산물들이다. 여기서 웨슬리의 창조적 목회의 Insight 을 몇 가지만 열거해 보자.

 

첫번째 웨슬리가 성경에서 발견해낸 가장 위대한 발견은 ‘평신도 사역’이다. 당시 천주교나

성공회의 사제들의 교권주의 권위주의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하나의 사건이라고 말할 수있다.

그의 사역의 주역들은 대부분 평신도들이었다. 그의 감리교운동은 곧 평신도 운동이었다. 평신도들을 양육하고 평신도들에게 강단을 Open하고 설교권을 주고 기존의 사제나 목회자 중심의 사역에서 평신도사역 중심으로 그의 부흥운동을 이끌었던 것이다. 이것은 기존의 성공회나 전통적인 교회에 대한 목회혁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모든 평신도들도 왕같은 제사장으로서 그들의 다양한 재능과 은사를 개발해서 사역에 참여토록하고 훈련된 평신도들로 신도회 밴드 속회를 이끄는 지도자들로 세웠다 요즘으로 치면 평신도 제자훈련이다. 초기 미국 감리교회를 이끌었던 Robert Strawbridge, Barbars Heck, Philip Embury, Thomas Webb 등이 다 평신도들이었다.여기서부터는 지면관계상 제목만 열거하고자 한다.

둘째로 웨슬리의 조직력이다. 그는 대중설교가라기 보다는 천재적인 조직가였다. 효과적인 사역을 위해 조직한 연합신도회, 속회, 밴드, 연회등의 조직을 통하여 서로간에 연결하여 Connection을 갖게 하여 사역의 효과를 극대화 하였다.

셋째는 영감넘치는 예배와 찬양이다.

당시 성공회의 제도적이고 형식적인 예배에 비해 형식에 매이지 않는 영감 넘치는 예배와 찬양, 특히 챨스 웨슬리의 현대적 감각의 찬양, 요즘으로 치면 복음송을 작사 작곡해서 많은 예배자들과 함께 찬양을 부르고 함께 공감하고 함께 감동케하였다.

넷째는 속회를 중심으로 한 소그룹운동이다. 요즘은 각교단에서 사용하고 있는 구역이나 셀그룹, 순장제도, 목장등이 다 웨슬리의 속회를 통한 소그룹 운동에서 온 것이라고 볼 수있다.

다섯째 천주교나 성공회의 건물 중심의 예배에서 민중속에 들어가 교회 밖에서 행한 야외설교다.

그의 고향 엡워스에서는 아버지 묘지위에서, 또 당시 대단한 인기를 끌었던 Hanham Mount 옥외집회에서, 사람들이 모이는 시장에서의 마켓전도 그리고 그 외에 성찬기나 우울증 치료기기 등도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의 창조적 능력은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을만큼 다양했다. 현대 교회의 문제중에 하나는 교회의 교리나 제도에 매여 목회사역의 다양성, 다양성속에 무궁무진한 창조성을 개발하지 못하는 데 있다고 본다. 그것은 잘못된 제도나 신학에서 기인할 수도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웨슬리의 영원한 아이콘(I-Con)으로 세계를 향하여 말을 타고 달리는 웨슬리이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방문한 곳은 웨슬리의 본격적인 사역이 시작된 최초의 감리교 건물인 New Room이 있는 항구도시 브리스톨이었다. 그 시골 항구에서 1771년 플랜시스 애즈베리(Francis Asbury)와 1784년 토마스 콕(Thomas Coke)등을 배에 태워 당시 신대륙인 미국으로 보냈고 그들은 미국 필라델피아에 도착하여 미국의 최초의 감리교회인 St. Georges Methodist Church 설립하게 되었다.

그 후에 1784년 볼티모어 있는 Lovely Lane Methodist Church에서 미국에서 최초Christmas Conference가 열려 정식 미국 감리교회가 탄생하게 되었고 그리고 다시 100년후 1883년 한국의 보빙사절단이 Washington DC로 가다가 Lovely Lane 교회의 가우쳐 박사를 만나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해 줄 것을 요청하였고 그 결과 아펜젤러 선교사가 한국 땅에 최초의 감리교 선교사로 한국 땅에 들어오게 되었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나타난 말을 타고 있는 웨슬리의 동상이 무엇을 말하는지 한눈에 알것 같았다. 복음을 들고 행동하고 세계를 향하여 말을 타고 달려가는 웨슬리! 그의 눈은 대서양 바다 건너편 저 먼 신대륙을 응시하는 듯 불타고 있었다.

나폴레옹이 말을 타고 알프스산맥을 넘는 그 당찬 모습이 그의 아이콘이 된 것처럼, 세계는 나의 교구다! 외치고 말을 타고 달리는 웨슬리의 모습은 웨슬리만이 아니라 전 세계 감리교회를 상징하는 아이콘이 되었다. 감리교 신학대학의 뱃지가 바로 말을 타고 성경을 읽고 있는 웨슬리이지 않는가?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의 동상은 항상 박사모와 박사 까운을 입고 서있는 학자의 모습이 그의 아이콘이라고 볼수 있다. 그러나 웨슬리는 당대 최고의 옥스포드에서 공부하고 링컨 칼리지에 Fellow가 되었지만 그는 강단 신학자라기 보다는 민중을 향해, 그들의 영혼구원을 위해 말을 타고 달려가는 전도자가 그의 아이콘이다.

브리스톨에 서있는 웨슬리가 탄 말의 모습은 당장 세계를 향하여 어디든 달려갈 것 같은 젊고 힘있고 날렵해 보였다. 그러나 내가 처음 미국에 도착하여 드류대학교(Drew Campus)에 있을 때 학교 정문에 또 한사람이 말을 탄 동상이 있었는데 그것은 미국 감리교회의 아버지라고 볼수 있는 에즈베리였다.

그런데 그 에즈베리를 태운 말은 브리스톨의 말 같지 않게 상당히 지쳐있었고 당장 주저앉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브리스톨을 출발한 말은 지구의 반바퀴를 돌아 미국 동부해안 지역 수천마일을 뉴욕, 뉴저지, 보스턴, 펜실베니아, 버지니아 등 당시 미국 13개주를 전도자들을 싣고 지치도록 달리다가 잠시 그곳에 머문 것은 아닐까. 그런데 놀라운 것은 말을 타고 있는 에즈베리는 웨슬리와 같이 말위에서 성경을 읽고 있었는데 그의 모습은 지치거나 눈이 흐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금 그 말은 어디쯤 달리고 있을까? 미국 전역을 돌고 태평양을 건너 한국에서 달리고 있을까?

한국만이 아니라 전 세계의 곳곳에서 지금도 힘차게 달리고 있는 웨슬리의 후예들을 상상해 본다.

 

이재덕(뉴저지 테넥한인연합감리교회 목사)

웨슬리가 다녔던 옥스대학교 크라이스트 처치 칼리지에서
이번 투어에 참가한 사모님들
웨슬리가 태어난 올드 렉토리에서
브리스톨 한암마은트에서 기도하는 참가자들
런던박물관내에 있는 웨슬리회심기념탑
감리교 최초의 교회당 브리스톨의 뉴룸
웨슬리 야외설교자리 한암 마운트 표지판
웨슬리의 탄생지 엡워스에서 단체사진
필자 이재덕 목사 부부가 브리스톨 항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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