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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
  • Posted by 크리스천 위클리 08/09/16
CBS 특집 다큐 ‘한국기독교 선교의 개척자 이수정’ 제작 후원 박경진 장로
“이수정은 미국 교회가 조선선교의 문을 열게 한 위대한 선교개척자”
박경진 장로

박경진 장로(진흥문화사 회장)가 CBS의 특집 다큐 ‘한국기독교선교의 개척자 이수정’을 제작 후원 과정을 설명하면서 “잊혀지기 쉬운 이수정의 위대한 선교발자취는 오래 오래 후대에 전해져야 한다는 생각에서 선뜻 제작을 결심했다”고 밝혔다.

지난주 LA를 방문한 박 장로는 이수정에 관한 이여기를 전해 듣는 순간 감동을 받았다고 말하고 그 순간부터 오랜시간을 거쳐 그에 관한 관련서적과 문헌을 수집했으며 전문가들의 고증을 거쳐서 제작된 다큐멘타리라고 말했다.

박 장로는 임오군란때 민비를 구했고 그로 인해 고종황제의 신임을 얻은 이수정이 일본에 건너가 츠다센으로부터 ‘공자보다 더 큰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에 관해 전해 듣고 예수를 영접했다고 설명했다. 이수정은 그 후 조선 땅에 미국 선교사가 필요하다는 서신을 미국에 보냈고 그 편지가 선교전문지에 소개되면서 마침내 조선선교의 문을 여는 선교의 개척자가 되었다고 설명했다. 그럼 CBS 특집 다큐를 통해 소개된 이수정, 그는 누구인가?

 ▷성장배경

이수정은 전남 곡성군 옥과면에서 이병규의 아들로 출생했다. 그의 가계는 일본 기독교인들의 기록이나 선교사들의 보고서 등으로 미루어 보아 전주이씨의 왕족과 근척인 집안으로 추정되어 학식이 높고 가풍이 당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기록에 보면 총명했던 이수정은 곧 조정에 등용되어 여러 방면에 공로를 세우고 일설에는 선략장군까지 지낸 무반 종사품관이라는 기록과 또 도승지 벼슬까지 올랐다는 기록도 있다.

 

도한 당시 조정에 유력자 민영익과는 깊은 교분을 가진바 있고 더구나 임오군란 당시에는 명성왕후 민비를 충주까지 무사히 피신시킨 공로로 인해 왕실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도일의 기회를 갖다.

 

1881년 일본을 다녀온 신사유람단의 한 수행원이던 안종수는 이수정과 절친한 사이로 귀국후 일본에서 만난 일본 농학계의 거두이며 기독교지도자인 츠다센의 이야기를 이수정에게 전하였다. 이 이야기를 들은 이수정은 새로운 문물에 대한 호기심으로 일본에 가려고 노력했다.

 

마침내 1882년 9월 그의 희망대로 도일할 기회가 왔다. 즉 임오군란 때 민비를 살린 공로로 고종 황제는 이수정에게 공로상을 주고 또 소원하는 대로 높은 벼슬을 주도록 분부했다. 그때 이수정은 대답하기를 "나로 하여금 외국문물을 견학하도록 하시되 특별히 일본으로 가는 것을 허락하여 달라"고 왕께 청원하였다. 이 말을 들은 고종황제는 서슴치 않고 쾌히 허락하여 이수정은 다시 "나를 공식으로 파견하신다면 책임과 의무가 있사오니 할 수 있는 대로 간섭이나 구속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연구하기 위하여 사적으로 가도록 해 주시옵소서"라고 아뢰니 왕은 그렇게 하라고 허락했다. 또 그는 토오코요 외국어대학의 한국어 교수직이 마련됨으로 정부의 공식적인 임무없이 서구문물에 대한 자유로운 연구가 보장되었다.

 

▷ 츠다센을 만나 기독교와 접하다

 

수신사 박영효 일행과 함께 도일한 이수정은 일본에 온 목적대로 일본의 문화시설을 시찰 특히 농업과 법률 우편제도 등을 살펴보려 했다. 그래서 그는 먼저 안종수에게 들은 일본 농업의 대가 츠다센을 방문했다. 츠다센은 이수정을 친절히 맞아주었다.

두 사람은 농사법, 법률, 우편제도 등 새 문물에 관한 대화를 나누다 기독교의 교리와 가치에 주된 화제가 쏠렸다. 이때 이수정은 츠다센이 보여준 한문으로 된 산상수훈 족자와 "공자의 빛은 부분적이므로 일본의 어두운 곳까지 비치지 못하나 예수의 빛은 해와 같아서 일본의 방방곡곡 전 세계 지구 이끝부터 저끝까지 비치인다"는 등의 기독교에 대한 설명을 듣고 이수정은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츠다센이 준 성경책을 보면서 읽으면 읽을수록 흥미진진하여 자신이 기거하는 곳에 가지고와 매일매일 그 뜻을 깊이 새기며 열심히 읽었다.

 

깊은 감명을 받으며 성경을 읽던 어느 날 이수정은 꿈을 꾸었다. 한사람은 키가 크고 한사람은 키가 작은 두 사람이 책이 꽈 차 있는 보따리를 걸머지고 이수정의 집에 찾아와 그에게 벗어준다. 이것이 무엇인가 하고 이수정이 묻자 두 사람은 책이라고 대답한다. 다시 이수정이 무슨 책이냐고 묻자 저들은 한국의 모든 책보다 가장 중요한 성경책이라고 한다. 꿈을 깬 이수정은 마음에 큰 충격을 받고 이것을 신비적 계시로 여겼다. 이상한 꿈을 꾼 후 그는 더욱 성경연구에 열중하였다.

 

▷ 세례를 받다

 

1882년 12월 25일 그는 츠다센의 안내로 축지교회의 크리스마스 예배에 참석하여 한없는 감동을 받아 예수를 믿을 마음이 생겼고 마침내는 세례를 받을 결심을 했다. 1883년 4월 29일 재일 장로회선교사 존 녹스(John Knox)의 입회하에 동경 노월정교회에서 야스가와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야스가와 목사가 세례문답을 하는데 그의 대답이 너무나 명확하고 틀림이 없어서 문답을 한 목사나 입회한 목사들이 다 놀랐다고 하며 세례를 받기에 조금의 부족함도 없었다고 한다. 특히 이 세례식은 일본에서 처음 베푸는 한국 사람인 동시에 한국개신교에 선구자가 되는 마게도니아 사람의 역할을 할 사람의 세례식이여서 선교사들과 일본 기독교신자 및 지도자들을 긴장케 했다고 한다.

 

▷ 성서번역 사명을 인식


이어 이수정은 요한복음 14장을 본문으로 한 자신의 신앙고백서를 발표했는데 이것은 그의 확고하고 성숙한 신앙고백으로 일본의 언론에 게재되었다.

 

이수정은 스스로 한국 최초의 개신교인임을 자각하고 민족에게 복음이 진리를 필히 전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탔으며 이에 이르는 가장 선결의 문제이며 또한 중요한 사업이 성서의 한글번역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는 또한 뜨거운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진 것이라 여겨진다.

 

▷ 현토한한신약전서 간행

 

그가 성서의 한국어 번역에 착수하자 녹스 선교사와 미국 성서공회 총무인 루미스(H. Loomis)가 적극 협력해 주었다. 그는 먼저 한문성서에 토를 단 <토한한신약전서>를 간행했다. 이는 한국선비들이 한문을 읽을 때 훈점이 필요없고 토를 달아 읽은 관습에 착안하여 만든 것으로 먼저 4복음서와 사도행전 즉 <신약성서마대전>, <신약성서 마하전>, <신약성서로가전>,<신야성서약습서>,<신약성서사도행전>이 1883년 탈고되어 1884년 미국성서공회의 자금 지원 하에 요코하마에서 인쇄 간행되었다.

이는 이수정의 한국의 유식한 선비들에게 성경의 진리를 전할 심산으로 현토성서의 간행을 주선한 것으로 특히 이<현토한한신약전서>는 이후 한국의 국한문혼용성서의 번역에 큰 영향을 미쳤다.

현토성서에 이어 이수정은 곧 한글성서번역에 착수한 첫 번역대상은 마가복음서였다. 그가 마가복음을 처음 번역하기로 결정한 것은 미국성서공회의 루미스 총무 등의 의견이 많이 반영되었고 또 그 길이가 복음서중 가장 짧고 표현문제도 간결하며 템포가 빠르다는 이유도 크다. 이 복음서는 1884년에 번역되어 1885년 요코하마에서 <신약마가복음셔연해>라는 이름으로 간행되었다. 체재는 국판, 양지 87면 연활자로 인쇄되었다.

 이 책은 언더우드, 아펜젤러 등 초기 한국 복음선교사들이 입국할 때 가지고 들어온 성서로 초기 한국 복음선교사들이 입국할 때 가지고 들어온 성서로 초기 공식적인 한글성서의 역할을 했다. 또 이는 이후 한국선교사들에 의해 조직된 성경번역위원회에서 간행된 한글성서의 기초가 되기도 했다.

그밖에도 몇몇 교리서의 번역, 한국천주교, 한국문화관계의 저서와 논문을 다수 남겼다.

 

▷ 한국 개신교 선교의 선구적 역할 담당


이수정의 또 하나의 공헌은 한국에서의 개신교 선교실시를 앞당기도록 한 노력이다. 1883년 12월 13일부터 외국선교잡지 <Reviw>에 한국선교를 호소하는 기고를 했고 1884년에는 ‘녹스선교사의 이름으로’ 라는 제목의 글을 같은 지면에 실었다.

 

이는 초기의 한국에 나온 개신교 선교사들의 한국선교동기를 북돋워 주는 역할을 했다. 뿐만 아니라 일본주제 매클레이(R.S. Maclay)선교사를 김옥균과 접촉시켜 한국을 방문케 하고 고종을 만나 교육과 의료선교 실시의 윤허를 받아내는 데에도 큰 조력자가 되었다.

그밖에도 윤치호 등 일본 유학생들을 지도 감독하는 자리에 있으면서 이들에게 전도, 1885년 7명이 모이는 예배집회를 시작함으로 이후 토오코오 한인유학생교회의 모체를 이루기도 했다. 이밖에 또 개화당의 주요 인물이었던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재필, 서광범 등에게도 복음을 전했으며 한국에 부임하기 전에 일본에 들렀던 초대 한국선교사 언더우드, 아펜젤러 등에게 한국어를 가르쳤고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그가 번역한 <신약마가젼복음셔언해>를 들려 보냈다.

이렇듯 한국개신교 선교의 선구적 역할을 담당했던 이수정은 갑신정변의 실패 이후 정치적인 불우한 환경으로 인해 구한국정부의 노여움을 샀고 심지어 교분이 두텁던 개화당의 김옥균과도 사이가 나빠져 그가 보낸 자객에 의해 몇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결국은 이수정의 애국충정이 오해된 가운데 1886년 귀국 즉시 처형된 것으로 전해지는데 그 확실한 진위여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수정이 한국에 들어오는 선교사들에게 한글성경을 전하고 있다[다큐 영상 캡처]
교회사가 김수진 목사가 펴낸 '이수정' 표지
동지사 대학 설립자(왼쪽)와 츠다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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