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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Posted by 크리스천 위클리 01/02/19
[신년초대석] 금년 90세 맞는 김동형 연합감리교 원로목사와 김영숙 사모
목회자는 늘 회개하고 정직해야 합니다
김영숙 사모와 김동형 목사

김동형 목사는 밸리에 있는 밴나이스 연합감리교회를 마지막으로 1998년 정년 은퇴했다. 지난해는 은퇴 2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은퇴 후에는 연합감리교 은퇴 목사관이라 할수 있는 로렌하이츠에 있는 ‘베이커 홈’에 거주하고 있다.

은퇴 후에 그가 설립한 선교회 이름은 북방선교회. 주로 중국선교를 목적으로 세워진 선교회였다. 김 목사가 특히 중국 선교에 정성을 쏟는 이유는 그가 중국에서 태어난 것과 무관치 않다. 그는 1929년 2월 22일 흑룡강성 해림에서 태어났다. 일제 강점기에 부친 김성식 목사가 그곳에서 목회하고 있었다. 목회자의 아들로 중국에서 태어난 김 목사는 목단강 조선인초등학교를 나왔다. 중국에서 태어났지만 일제 강점기라 일본어만 사용할 수 있었기에 지금도 중국어는 일본어만큼 능숙하지 못하다. 아버지 김성식 목사는 6.25 전쟁 때 납북되어 그 뒤 생사를 모르고 있다. 아마도 납북된 후 순교했을 것이라고 믿고 있을 뿐이다.

해방 후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어 1975년부터 미국 이민목회를 시작, 모두 3개의 성장하는 연합감리교회를 세운 후 은퇴 20주년을 맞는 김동형 목사와 김영숙 사모를 신년 초대석에 모셨다.

                                                                                                                                     [편집자]

 중국 해림에서 태어나신 후 학교를 어디로 진학하셨습니까?

 

-해방 후 서울에 있는 경기전기공업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체신부에 취업이 되었어요. 광화문에 있던 중앙전신전화국 시험실에서 일했습니다. 해방 후 조금 지나 6.25 전쟁이 발발하자 공군에 자원입대했습니다. 중앙전신전화국에서 일한 경험도 있고 해서 정보기술장교로 진급이 되었고 마침내 UN 특수부대 장교로 차출되기도 했습니다. 아주 극비리에 북한에 침투하는 게 특수부대의 임무였습니다.

 

군 복무를 마친 후 신학교에 입학하셨나요?

 

-네. 목사로서의 소명을 받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목사가 되기로 하고 감리교 신학교에 지원했습니다. 당시 40명이 입학정원이었는데 모두 70여명이 지원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남가주에 지금도 거주하고 있는 그때의 감신 동기생들로는 조석환, 김영모, 이처권 목사가 있고 이미 세상을 떠난 고 김동호 목사님도 동기생입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목회를 시작하신 곳은?

 

-1957년 감신대를 졸업했습니다. 그리고 처음 부임한 곳이 경기도 주안감리교회였습니다. 그 교회에 부임하여 2년이 지난 1959년 근처 교회에서 전도사로 사역하던 김영숙 전도사를 만나 결혼했습니다. 아내는 감신대 동문이고 나보다 4년 후배입니다.

 

주안교회에서 몇 년을 시무하셨습니까?

 

-주안교회에서 1957년부터 1967년까지 10년을 목회했습니다. 그러다 부평에 있는 부광교회의 초청을 받아 사역지를 옮겼습니다 부광교회에서는 1967년부터 1975년까지 시무했습니다. 내 목회를 쭉 뒤돌아보면 10년 주기로 교회를 이동하며 목회한 것 같습니다. 부광교회도 거의 10년을 목회하고 미국 이민 길에 올랐지요. 부광 교회 속장 한명이 LA로 먼저 이민을 가더니 나를 미국으로 초청했습니다. 그런데 나보다 먼저 유학생으로 미국에 와 있던 여동생이 있었습니다. 오빠인 내가 미국에 오자 자기는 이미 시민권을 따 놓은 상태이니 나중을 생각해서 가족 이민 수속을 밟아 영주권을 신청하자고 했어요. 그런데 신청 1주일 만에 영주권이 나왔습니다. 그렇게 해서 1975년부터 이민목회가 시작되었지요.

 

 

미국에서 처음 개척하신 교회는?

 

-제가 1975년 미국에 와서 그해 8월 11일 로스펠리즈감리교회를 개척했습니다. 제가 1년 후에 미네소타로 이주하면서 후임으로 심근섭 목사님이 오셨고 3대이신 윤선식 목사님이 담임목사로 오셨을 때 교회가 연합감리교단에 가입되어 오늘날의 로스펠리즈연합감리교회가 된 것입니다.

 

미네소타로 이주하시게 된 이유는?

 

-로스펠리즈 감리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교인들이 당시의 LA 교육환경이 너무 열악하다는 말을 했습니다. 모두 자식들의 장래를 보고 이민을 결정한 사람들인데 당시 마약과 청소년 범죄가 심각한 LA도시 환경은 도저히 자녀교육으로는 적절하지 못하다면서 다른 곳으로 이주하자는 주장을 펴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래서 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조사 끝에 교육환경이 뛰어나다고 소문난 교육도시 미네소타로 옮겨가자고 결정했습니다. 마침 신학교 동기생인 조창식 목사님이 미네소타 감리교회를 개척한 직후 한국으로 급히 돌아갈 일이 생겨서 그 교회를 맡기로 하고 이주를 결정했지요. 그때 함께 따라나선 교인가정이 7가정이었습니다.

 

미네소타 감리교회에서의 목회는 어땠습니까?

 

-미네소타 감리교회에서 10년을 목회하고 결국은 다시 LA로 돌아온 셈이지요. 1976년 12월에 취임하고 이듬해인 1977년 5월에 미네소타한인연합감리교회로 교회 이름을 변경하고 옥데일에 있는 호프교회로 이전을 했습니다. 그리고 1983년엔 뉴 브리튼에 학교 건물을 구입해서 교회당을 이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창립 10주년 기념예배를 드리면서 후임에 이덕균 목사님을 세우고 저는 LA로 돌아 왔습니다. 미네소타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교회가 크게 성장했어요. 미네소타에 있는 한인교회 중 가장 큰 교회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로스펠리즈 교회를 개척하시고 다시 LA에 오셔서 시작하신 교회는?

 

-사실 미네소타 연합감리교회를 사임하고는 아주 작은 소도시로 가서 목회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는데 마침 LA에서 연락이 왔어요. 교회가 개척되어 목사님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청빙을 받아 LA로 다시 오게 된 것이지요. 1986년 4월에 20여명의 교인들이 LA 한인타운 ‘성은장’(현재 ‘어원’식당자리)이란 음식점에 모여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22일 성은장 식당에서 교회 이름을 나성복음연합감리교회로 정하고 창립예배를 드렸어요. 그리고 초대목사로 제가 청빙을 받아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그 나성복음연합감리교회가 나중에 밴나이스 연합감리교회가 되었지요?

 

-그렇습니다. 1986년 12월에 예배장소를 셔먼옥스 연합감리교회로 이전을 했고요. 2년이 지난 1988년 1월 예배장소를 현재의 밴나이스 연합감리교회로 옮겼습니다. 교회 표어를 "성장하는교회"로 정하고 교회 부흥에 힘써 왔습니다. 아마 그 시기에 수요 성경 강해를 시작하고 벧엘 성서연구에 주력하면서 교회가 질적으로 양적으로 크게 성장의 틀을 잡아가기 시작했습니다. 1988년 6월에 개최된 교인 총회를 통해서 미국 연합감리교단에 가입하고 교회 정식 명칭을 밴나이스복음연합감리교회로 정했습니다.

 

밴나이스 연합감리교회를 끝으로 목회현장에서 은퇴하셨는데 당시 그 교회의 교세는 어땠습니까?

 

-제가 밴나이스연합감리교회에서 12년을 목회하고 은퇴했는데 은퇴할 때 재적인원이 약 600명이었습니다. 소속 연회에 내는 연회 분담금을 우리 연회가운데 가장 많이 내는 교회로 알려졌는데 사실 여부는 확인해 보지 못했습니다. 아무튼 제가 은퇴할 때 연회 분담금을 연간 10만 달러를 내라고 통보를 받은 적이 있어요. 이건 너무 많다고 조정해 달라고 한 적이 있을 만큼 연회분담금은 꽤 많이 냈습니다. 교회가 성장하면 당연히 부담해야할 의무금이라 생각하고 저는 연회 분담금은 곧 교단의 선교분담금이라 생각하고 열심히 냈습니다.

 

목사님은 미국에 이민 오셔서 로스펠리즈연합감리교회, 미네소타 연합감리교회, 밴나이스 연합감리교회를 개척하거나 혹은 시무하시면서 모두 다 중형교회 이상의 규모로 교회를 키우셨습니다. 그동안 목회하시면서 일관되게 지향해 오신 목회철학이 있다면 무엇을 들 수 있을까요?

 

-부족한 사람이 한 것이 아니라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지요. 다만 저는 목회하면서 일관되게 복음주의 신앙의 바탕에서 목회하자, 섬기는 목회를 하자, 선교에 힘쓰는 목회를 하자,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목회를 하자, 그런 몇 가지를 강조하면서 목회해 온 것 같습니다. 저는 성경대로 가르치고 성경에서 벗어나면 안된다고 생각하며 목회했습니다. 이민목회는 다 아시다시피 섬김의 목회, 케어 목회입니다.

미네소타에서 목회할 때 내 이름은 몰라도 교민사회에서 ‘감리교 목사’하면 날 가리켰습니다. 감리교 목사는 취직 잘 시켜준다고 소문이 나 있었습니다. 아이들 학교 입학하는 일에서 공항 픽업, 아파트 얻어주는 일까지 모두 목사가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순종했습니다. 처음 이민 온 사람들 일터를 잡아 줘야 하니까 여기저기 뛰어다니다 보니 커뮤니티에서 감리교 목사는 취직 잘 시켜 주는 목사라고 소문이 난 것이지요. 이 섬김의 목회란 나뿐 아니라 이민목회를 하시다 은퇴하신 모든 목사님들이 한결같이 해 오신 일입니다. 나보다 더 열심히 교회와 성도들을 섬기고 봉사하며 목회하신 어른들이 허다하게 많이 계십니다.

 

목사님은 교회를 성장시키면서 ‘설교 잘 하시는 목사님’이라 소문이 나기도 했었습니다. 목사님 설교에 관해서 말씀해 주시지요?

 

-저는 설교를 잘 못합니다. 주변에서 하시는 과찬의 말씀이지요. 그저 성경 본문대로 설교하려고 애쓴 것 뿐 입니다. 제목 설교도 가끔 했지만 주로 강해설교를 더 많이 한 것 같습니다. 설교는 대개 20-30분 분량으로 하는데 나 역시 내가 설교한 만큼 살지 못했습니다. 내가 설교해 놓고 설교한 만큼 살지 못하면 거짓말을 한 셈이지요. 그러나 부족하지만 설교한대로 살아보려고 노력은 했습니다. 그게 안되니까 더 기도하게 되고요.

목사님을 청빙할 때 대부분의 교회들은 목사님의 설교를 제일 먼저 봅니다. 설교가 목회에서 참으로 중요하고 또 설교를 위해 많은 것을 목사님들이 투자합니다. 그런데 설교 잘해서 교회가 부흥하는 것은 길어야 3년입니다 3년이 지나면 목사님이 어떻게 사는냐가 중요합니다. 교인들에게 그때부터 목사님의 삶이 보여지기 시작합니다. 목사님의 삶이 설교와 동떨어진 것이라면 교인들이 더 붙어 있지 않습니다.

 

오늘 목회현장에 있는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은?

 

-요즘 젊은 목사님들은 공부도 많이 하고 창의성도 풍부합니다. 또 시대를 읽는 안목도 대단합니다. 저 같이 은퇴한 목사가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꼭 말씀드려야 한다면 두 가지 정도입니다. 하나는 목회자도 반성과 회개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정직하게 목회하면 실수하고 부족해도 하나님이 기뻐하신 다는 것입니다.

설교는 회중에게만 선포하는 말씀이 아니라 늘 그 회중가운데 설교자인 내가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내가 선포한 말씀이 바로 나를 향한 말씀이라고 생각해야 하지요. 설교하는 목사가 나는 설교대상의 열외자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래야 목회자 자신이 늘 회개하고 반성합니다. 그래야 하나님 앞에 바로 설수가 있습니다.

목회자가 모든 면에서 정직해야 하지만 우선은 돈에 정직해야 합니다. 목회자가 돈의 노예가 되면 안됩니다. 인간은 연약해서 돈으로부터 자유하기가 쉽지 않아요. 그러나 돈에 정직해야 목회가 편안합니다.

제 자랑이 아니라 그냥 지난 목회를 회고하는 마당이라 부끄럼 없이 애기 합니다. 저는 부흥회를 많이 다니지 않았지만 부흥회 가서 사례비를 받으면 모두 교회에 헌금했습니다. 교인들이 불평이 없습니다. 부흥회 다니면서 돈 벌러 다닌다고 교인들이 불평하기 시작하면 당연히 목회자와 교인들의 신뢰가 깨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교회에 도움이 될 리가 없습니다.

미네소타 연합감리교회를 10년 목회하고 떠나올 때 퇴직금 2,000달러를 받았습니다. LA에 와서 교회 개척할 때 모두 헌금했습니다. 돈에 대한 욕심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 앞에 정직해야 되겠다는 신념을 갖고 돈에 정직해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미네소타에서 목회할 때 한 재정위원장이 “김동형 목사가 월급 올려달고 했다”는 소문을 내고 다녔습니다. 월급 올려달라는 말이 잘못이 아니라 내가 그런 말을 하지도 않았는데 나를 코너에 몰기 위해 그런 말을 교회에 퍼트린 것입니다. 우리 부부가 몹시 서운했습니다. 화가 났습니다. 그런데 기도 중에 하나님께서 그냥 묻고 가라는 음성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억울했지만 그냥 참고 지나갔습니다. 몇 십년이 지나 어디 살고 있는지도 까맣게 잊고 있던 그 옛날 재정위원장이 시애틀에서 갑자기 전화가 왔습니다. 자기가 그때 목사님을 곤란에 빠트리려고 꾸며낸 말인데 이제서 회개하고 용서를 빈다는 전화였습니다. 그때 저 재정위원장이 거짓말쟁이라고 내가 받아치지 않고 그냥 마음속에 묻어 인내한 일이 참으로 잘한 일이었구나 생각했습니다. 돈에서 정직하려고 노력하면 하나님께서 언젠가는 억울한 일도 다 풀어주신다고 생각합니다.

 

목사님은 목회가 바쁘셔서 교회 밖의 많은 직책을 맡지 않으신 것으로 아는데 그래도 맡으신 직책이 있었다면?

 

-은퇴 후에는 북방선교회를 창립해서 활동해 왔지만 남가주감리회 원로목사회장을 맡아 봉사 한 적이 있고 현역으로 있을 때는 남가주연합감리교 협의회장을 맡아 일한 적이 있습니다.

 

은퇴하신 후 일상은 어떠십니까?

 

-은퇴하고 베이커 홈에 들어 온 후 매일 새벽 예배에 나갑니다. 연합감리교 목사이기에 연합감리교회를 나가려고 했는데 당시에는 연합감리교회가 새벽예배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일 가까운 ‘아름다운 교회’(고승희 목사 시무)로 새벽기도회에 나가기 시작하여 지금까지도 계속 출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일예배는 역시 제일 가까운 연합감리교회인 남가주 주님의 교회(김낙인 목사 시무)에 출석하고 있어요. 우리 부부 모두 저녁 7시면 잠자리에 듭니다. 그리고 새벽 3시쯤에 일어나면 그때부터 우리는 따로 따로 매일 성경 10장을 소리 내어 읽고 있습니다. 이웃에 방해가 되지 않으려고 낮은 소리로 읽지만 소리 내어 읽는 것이 건강에도 좋고 집중력에도 좋다고 합니다. 그리고 새벽기도회 끝나면 아침식사 후에 걷기 운동, 그리고 목사님들과 옛 이야기 등을 나누며 점심교제를 하지요. 여러 모임이 많아서 여기저기 다 찾아다니기도 사실은 바쁩니다. 은퇴가 지루할 것 같은데 막상 해 놓고 보면 절대 지루하지 않아요.

 

자녀들을 소개해 주세요

 

-1남 3녀의 자녀가 있습니다. 딸 둘은 결혼했고 막내딸은 소셜워커와 대학 강사로 일하고 있는데 아직 미혼입니다. 아들은 목사이고 이름은 김 신입니다. 하버드대학신학부에 입학했다 고든 콘웰 신학교를 졸업한 후 목사가 되었습니다. 시애틀에서 12년 목회하다 지금은 클리블랜드에서 청년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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