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Login    /   Logout
213.383.2345
설교
  • Posted by 크리스천 위클리 01/03/18
[신년지상설교] 가시를 주신 이유(고린도후서 12:7-10)
정상용(나성금란교회 목사)

저는 부모님이 교회를 다니지 않는 집안에서 3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위로 형이 하나 아래로 동생이 둘 있습니다. 남동생 하나, 여동생 하나. 저희 부모님은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신학교 들어가는 걸 반대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고집을 피워서 신학교를 들어갔습니다. 서울에 있는 감리교신학대학에서 4년을 공부하고 저는 한국에서 목회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갈 곳이 없었습니다. 신학교를 졸업 할 무렵 다른 친구들은 목회를 하기 위해 떠나는데 저만 교회를 찾지 못했습니다.

제가 교회를 찾지 못한 데는 두 가지 정도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 교회 계통에 아는 사람이 너무 없었습니다. 그 당시 신학교 친구들은 대부분 목사 아니면 장로 아들이었습니다. 최소한 집사 아들은 됐습니다. 그런데 저는 집안을 통 털어 집사는 커녕 교회 다니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게다가 저 자신도 신학공부를 하면서 신앙을 잃어버려서 교회를 열심히 다니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소위 줄도 없고 빽도 없고, 게다가 믿음도 없고. 지금 생각하면 다 변명이지만 그래서 목회지를 찾지 못했습니다.

둘째, 제가 교회를 찾지 못한 이유는 선배들을 사귀지 못했습니다. 집안에 줄이 없으면 선배라도 잘 사겨야 하는데 (그래야 선배를 통해 교회를 찾을 수 있으니까) 그런데 저는 워낙 내성적인 성격이라 선배를 사귀지 못했습니다. 아는 선배들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선배를 통해서도 교회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미국까지 온 것입니다. 1988년 9월 서울 올림픽 준비가 한참일 때, 저는 쓸쓸하게 혼자서 시카고 공항에 도착을 했습니다. 그 당시 저는 미국에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사돈의 8촌, 친구,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남들은 꿈을 안고 미국에 오는데, 저는 꿈이 아니라 솔직히 말해 갈데가 없어서, 미국까지 온 것입니다.

1988년 9월부터 시카고에 있는 감리교 신학교인 게렛 에반젤리컬 신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한국에서 신학교 다닐 때는 맨날 땡땡이만 쳤는데, 미국에서는 갈 데도 없고, 할 것도 없고, 열심히 공부만 했습니다. 공부를 하다 보니까 재미가 붙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보다는 교수를 해야지 마음을 먹었습니다. 모든 게 순조롭게 잘 진행이 됐습니다. 좋은 성적으로 3년 Master 과정을 마치고, 1992년 버클리에 있는 GTU 신학교에서 박사 과정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공부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몸이 좀 피곤했습니다. 특별히 아픈 데는 없었지만 몸이 쉽게 피곤해졌습니다. 그래서 버클리 대학 학교병원을 찾아갔습니다. 학생은 공짜였기 때문에 검사나 한번 받아보자 그런 마음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의사가 피검사를 해 보더니 깜짝 놀라면서, 이런 상태로 어떻게 살았냐고 하면서 그 자리에서 입원을 시켰습니다. 그때 피검사 결과 제 헤모글로빈 수치가 4정도 됐습니다. 보통 성인 남자는 15 이상은 돼야 정상인데, 저는 4니까 낮아도 너무 낮은 것이었습니다. 보통 사람이 이 정도면 그 자리에서 기절을 하고 만다 했습니다.

제가 멀쩡하게 깨어있는 게 신기하다고 하면서 부랴부랴 입원을 시켰습니다. 병원에서는 저를 걷지도 못하게 하고 당장 휠체어를 타게 했습니다. 졸지에 중환자 취급을 받았습니다. 갑자기 입원을 하니까 정신이 멍멍했습니다. 내일 학교도 가야 하는데 오늘 갑자기 중환자 신세가 됐으니... 내가 꿈을 꾸고 있나 싶었습니다. 도무지 현실 같지 않았습니다.

 

그날 밤 병원에서 잠을 자는데 참 기가 막혔습니다. 이건 영화도 아니고 소설도 아니고... 뭐 이런 스토리가 다 있나 싶었습니다. 급성 백혈병이라면 금방 죽는 병 아니겠습니까? 1주일 내로 죽을 수도 있는 병입니다. 내 인생은 아직 제대로 시작도 못했는데, 지금까지 계속 준비만 했는데, 갑자기 끝이라니? 기가 막혔습니다. 저는 원래 체질이 건강한 편이었습니다. 건강해서 감기약 한 번 먹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미국에 와서도 병원 한 번 가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1992년 그 날, 딱 한 번 병원에 갔는데 죽을병에 걸렸다니.. 참 기가 막혔습니다.

그 날 밤 병원에서 잠을 자는데, 처음에는 허무하더니 나중에는 무서웠습니다. 말로만 듣던 죽음이 바로 코앞에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죽음이 남의 일인 줄 알았습니다. 남들 떠나는 것은 많이 봤죠. 그런데 갑자기 내 차례가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막상 내 차례가 되니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 무서웠습니다. 죽음이 그렇게 무서운 것인 줄 저는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말은 쉽게 하며 살았는데, 막상 죽음이 코앞에 닥치니까 왜 그렇게 무서운지... 누가 나를 좀 도와주었으면 좋겠는데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도와 줄 마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도와 줄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죽을 때는 인간이 참 고독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무도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때 놀라운 경험을 했습니다. 절망과 공포 가운데 혼자 떨고 있는데, 그 때 저를 찾아오신 분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제 마음에 다음과 같은 말씀을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28:20.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세상 끝 날까지, 항상 함께 있겠다는 말씀, 전에도 이 말씀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세상 끝날"이 나하고 상관없는 "세상의 종말을" 뜻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내가 죽음 앞에 서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신 “세상 끝날”은 “내가 죽는 날”인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죽는 날에도 함께 계시겠다는 뜻이었습니다. 혼자가 아니라, 예수님이 함께 계심을 알고 나니까, 마음에 평안이 왔습니다. 비로소 평안히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다음 날 의사가 말하길, 도무지 병명을 알 수 없다 했습니다. 미스테리라 했습니다. 다만 적혈구 피가 많이 모자라니까 일단 철분을 많이 먹어주라고 처방을 해 주었습니다. 철분만 대량으로 처방해 주고 특별한 병이 없다 하니까, 저는 신이 나서 퇴원을 했습니다. 열심히 철분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한 열흘 정도 지나서 놀라운 일이 발생했습니다. 소변을 보는데 갑자기 피가 쏟아졌습니다. 소변이 빨갛게 나왔습니다.

깜짝 놀라서 병원에 연락을 하니까 다시 입원을 시켰습니다. 또 온갖 검사를 다 해 보고 그제서야 정확한 병명이 나왔는데 P.N.H라 했습니다. 듣도 보도 못한 병이었습니다. 이 병은 몸에서 피가 빠지는 병이었습니다.

병을 발견하고 나서 제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공부를 계속하다 죽느냐, 목회를 하다 죽느냐, 뭐 이런 상황이었습니다. 공부를 계속 하다 죽는 것을 먼저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생각은 너무 허무했습니다. 박사 학위를 받아서 무덤에 꽂아 놓으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아무런 가치가 없어 보였습니다.

당연히 목회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목회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연합감리교회 목사 안수 과정을 시작했는데, 놀랍게도 목사 인터뷰에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제가 떨어질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이미 6년을 신학공부 했고, 미국에서 4년을 또 신학공부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 인터뷰에서 떨어졌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습니다. 더구나 저는 모든 길이 막혀있는 상태였는데...

그때 LA에서 인터뷰 떨어지고 산호제까지 7시간 운전을 하고 돌아가는데, 비는 부실부실 내리고, 마음은 절망스럽고, 운전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러다 정말 사고 나겠다 싶어서 프리웨이 옆에 보이는 모텔로 들어갔습니다. 모텔에서 기도를 했습니다. 그 기도는 짧았지만 제 인생에서 가장 진실한 기도였습니다. “하나님. 왜 이러십니까? 죽을병을 주신 것은 빨리 목회하라는 뜻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목사 시험에서 떨어지게 하신 것은 또 무슨 이유입니까? 하나님. 도대체 왜 그러십니까?”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정말 마음이 참담했습니다. 그런데 고마우신 하나님이 응답해 주셨습니다. "이게 다 훈련의 과정이다."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너무나 분명하게 제 마음에 계속 말씀해주셨습니다. "목사가 실패를 경험하지 않고.. 어떻게 양들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겠니?"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나니까 제 마음에 평안이 생겼습니다. 버림받은 게 아니라. 하나님이 여전히 인도하고 계심을 알고 나니까 기운이 났습니다. 저는 지금까지도 그때 목사 인터뷰에서 떨어진 것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제가 그 때 실패했기 때문에 실패한 사람들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 실패했기 때문에, 목사의 직분을 너무나 귀하게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 다음 해 인터뷰를 무사히 통과하고 목사 안수를 받을 때 감격을 했습니다. 신학교를 입학한지 15년 만에 목사가 됐으니 얼마나 감개무량 했겠습니까? 더구나 한 번 떨어지고 붙었으니... 목사의 직분이 너무나 귀하게 느껴졌습니다. 또 한 가지 감사했던 것은 미국 감리교회는 파송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교단에서 교회를 찾아서 저를 보내주었습니다. 그 곳이 바로 하와이였습니다.

 

그래서 1994년 7월 1일 하와이로 갔습니다. 아는 사람 하나도 없는 하와이에서 부목사 생활을 시작했는데, 2년이 금방 지나갔습니다. 2년 후 저는 하와이를 떠나고 싶었습니다. 본토로 가서 영어 목회를 해 보고 싶었습니다. 하와이를 떠나기 위해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는데, 교단에서 엉뚱한 소리를 했습니다. 하와이에 그냥 남아서 교회를 개척하라고 명령을 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저는 개척교회 스타일이 아닙니다. 저는 숫기가 없어서, 할렐루야, 아멘도 잘 못하고, 예수 믿으시라고 전도도 잘 못하는데, 무슨 개척교회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저에겐 병이 있지 않습니까? 병든 몸으로 어떻게 개척교회를 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감리사님에게 개척교회는 도저히 못하겠다고 하니까 1달만 해 보라 했습니다. 1달 해 보고 안 되면 다른 데로 보내주겠다 했습니다.

 

"하나님. 하필이면 왜 저를 개척 교회로 보내십니까. 하나님도 아시다시피 나는 몸에 병이 있지 않습니까. 시한폭탄 같은 병이라 언제 터질지 모르는데, 이 병을 안고 어떻게 개척교회를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에게는 병 때문에 못하겠다는 말도 할 수 없고, 하나님은 다 아시면서 왜 나를 이런 길로 가게 하십니까? 하나님. 제 마음이 너무 불안합니다. 의지할 사람이 없습니다. 지금이라도 좀 안전한 교회로 보내주시면 안될까요?"

 

저는 안전한 교회를 소망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제 마음에 이렇게 질문을 하셨습니다. “네 생각에 어떤 교회가 제일 안전하다고 생각을 하느냐?” 제가 아주 똑똑하게 대답했습니다. “안전한 교회는 1) 적어도 교인이 100명은 돼야 하고, 2) 자체 건물이 있어야 하고, 3) 교인들도 순해야 하고, 이런 교회가 안전한 교회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제 말을 듣고 한참 침묵을 지키시더니, 제 마음에 분명하게 한 마디를 주셨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안전한 교회는 내가 함께 하는 교회다.” 제가 그 말을 듣고 정신이 번쩍 났습니다. 할 말이 없었습니다. 제 잘못을 깨닫고 회개를 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잘못 생각을 했습니다. 안전한 교회는 사람 숫자에 있지 않고, 안전한 교회는 교회 건물에 있지 않고, 안전한 교회는 착한 교인들에게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에 있습니다. 다른 건 없어도 좋으니 오직 하나님만 함께 하여 주옵소서."

 

개척 교회를 하면서 저는 목회를 배웠습니다. 교인 한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았습니다. 그렇지만 사람을 보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봐야 한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개척교회는 처음에 인간적으로 볼 때 가장 위험한 교회처럼 보였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까 가장 안전한 교회로 변했습니다. 하나님이 넘치도록 채워주셨습니다. 저는 100명 교인을 소원했는데, 하나님은 300명 교인을 주셨습니다. 저는 자체 예배당 건물을 소원했는데, 하나님은 자체 예배당에 사택 3개를 더하여 주셨습니다. 저는 순한 교인들을 얘기했는데, 하나님은 저를 너무나 사랑해 주는 교인들을 주셨습니다. 그 교인들의 사랑 속에서 골수이식 수술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4년 반 전에는 나성금란교회 담임목사로 보내주셨습니다.

 

제 인생을 돌아볼 때, 제 인생에는 여러 가시가 있었습니다. 때로는 저를 너무 아프게 찔러서 눈물이 날 때도 있었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 가시 덕분에 하나님을 붙잡고 살 수 있었습니다.

제가 병 때문에 얻은 축복이 몇 가지 있습니다.

 

(1) 제 혈기를 꺾어 주셨습니다. 부끄럽지만 저에게 혈기가 있었습니다. 사람들하고 다투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보통 때는 순한 양(洋) 같은데, 누가 시비를 걸면 화를 내고 싸우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이런 성격을 가지고 목회를 하면 십중팔구 실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병이 있으니까 혈기를 부릴 수가 없었습니다. 병이 없었다면 저는 분명 혈기 때문에 목회를 실패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2) 저희 부모님을 구원시켜 주셨습니다. 제가 신학교를 들어 갈 때, 저희 부모님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제가 신학교를 졸업할 때, 저희 부모님은 여전히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제가 미국에 올 때, 저희 부모님은 여전히 믿지 않았습니다. 부모님뿐 아니라 사돈의 팔촌 집안의 어떤 사람도 교회를 다니지 않았습니다. 저는 부모님의 구원을 놓고 오랫동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기도를 하면서도 계속 의심했습니다. “이게 가능할까? 내가 한국에서 부모님 곁에 있는 것도 아니고, 수만리 떨어진 미국에 있는데, 어떻게 우리 부모님이 교회를 다닐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가능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병에 걸리고 나니까 저희 부모님이 변했습니다. 자식이 죽는다는데 항복 안 할 부모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새벽기도를 다니고, 철야기도를 다니고, 없던 믿음이 제가 투병할 때 다 생겼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때로 잔인해 보이지만, 결국 여러 사람을 구원시켜주셨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저희 어머니가 예수님을 잘 믿고 천국에 가셨습니다. 하나님이 저에게 죽을병을 주시고 저희 가족들을 다 구원시켜주신 것입니다.

 

(3) 저와 제 형을 화해시켜 주셨습니다. 죄송한 얘기지만 제 바로 위에 형이 한 분 있는데 저하고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말도 안 하는 사이였습니다. 서로 미워했습니다. 저는 미국에 있고 형은 한국에 있고. 만날 기회도 없었습니다. 제가 병을 처음 발견하고 가족들 모두가 서둘러 골수 검사를 받았습니다. 3남 1녀 형제 모두, 그리고 부모님이 검사를 받았는데, 5명 중에 다 안 맞고 딱 한 사람만 매치가 됐습니다. 누구였을까요? 바로 형이었습니다. 동생이나 부모님하고 매치가 됐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형 얼굴 다시 볼 필요가 없으니까. 그러다 2001년에 수술을 받기로 결정하고 형이 시애틀 병원으로 왔습니다. 직장까지 쉬면서 한 달 정도 저랑 같이 시간을 보내면서 저한테 골수를 주고 갔습니다. 그리고 쌓였던 미움과 오해가 풀렸습니다. 제가 병상에서 고통당할 때, 제 손을 잡고 형이 기도를 해 주었습니다. 지금 제 몸에는 그렇게도 미워했던 형의 골수가 뜨거운 피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아멘.

 

 

 

 

List   

The Christian Weekly
3700 WILSHIRE BLVD. #755
LOS ANGELES, CA 90010
TEL. 714.383.2345
Email. cweeklyusa@gmail.com
COPYRIGHT © 2015 THE CHRISTIAN WEEKLY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