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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Posted by 크리스천 위클리 08/28/20
[특별기고] 친일파 논쟁에 대한 성서적 고찰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이창기(독일 프랑크푸르트감리교회 목사)

1. 친일파 논쟁

 

최근 들어 친일파 논쟁에 불을 지핀 것은 고 백선엽 장군의 장례식과 김원웅 광복회 회장의 제 75회 광복절 경축사이다. 친일파 청산에 대한 찬반이 팽팽하다.

‘친일’에 대한 역사의 논쟁은 반민족행위자 처벌법으로 시작된다. 친일 청산을 위해 1948년 9월 22일 반민족행위자 처벌법을 법률 제3호로 제정되었고, 1948년 10월부터 반민족행위자 특별조사위원회(약칭, 반민특위)가 구성되었다. 그러나 국가적으로 인재들이 필요했기에 친일 청산은 미완에 그쳤다. 몇 번의 반민특위 법의 개정 끝에 1949년 10월에 반민특위는 해체되었다.

그러므로, 한국의 역사학계는 친일 청산을 위해 친일파들을 더 걸러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2002년부터 시작하여 2009년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친일파들을 걸러 내는 작업에 착수하여 친일 명단을 발표하였다. 마지막 발표에서는 5천명이 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아직도 “대한민국은 민족반역자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유일한

나라가 되었고, 청산하지 못한 역사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김원웅, 8.15경축사)고 말하고

있다.

 

2. 스가랴가 본 하나님의 긍휼

 

세속사와 구속사의 관점이 얼마나 다른가 하는 것을 우리는 스가랴 3장에서 잘 읽을 수가 있다. 기원전 538년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유대인들은 오래 전 바벨론 느브갓네살

대왕의 침공으로 폐허가 된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해야 했다. 그 큰 일을 앞에 놓고 그 일을 앞장 서 추진할 지도자가 필요했다. 이스라엘 유다 백성들은 두 지도자를 세우게 되었는데 스가랴 3장에서는 종교적인 지도자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스가랴 4장에서는 정치적인 지도자 총독 스룹바벨을 각각 세우게 되었다.

스가랴 3장 1절에서 선지자 스가랴는 하나님께서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세우시는 장면을 환상 중에 보게 된다: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섰고 사단은 그의 우편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여호수아가 사자(천사) 앞에 섰고 사단은 그의 우편에 서서 여호수아를 대적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사단이 왜 여호수아를 대적하고 있을까? 근거도 없이, 이유도 없이 대적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3절에 보면 그 근거와 이유가 확실하다: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섰는지라.”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었다는 표현은 그에게 나쁜 행실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는 지도자로서 부적격자라는 것을 나타낸다. 그러나, 성경은 여호수아에게 무슨 나쁜 행실이 있었는지에 대해서 침묵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알 수가 없다. 그의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무슨 비난 받을만한 행실이 있었을까?

우리 선조들도 일정 시대 때 신사 참배를 했으며, 창씨 개명을 했고, 돈이나 쌀가마 등 공출도 했고, 한국 젊은이들에게 일본군 징용을 장려하기도 했다. 소위 ‘친일’을 했던 것이다. 여호수아도 그런 떳떳하지 못한 행실이 있었을 것이다. 사단은 그것을 빌미로 그를 대적하였다.

지금 사단이 하는 일은 친일 논쟁을 벌이고 있는 우리의 모습과 일치한다. 친일 분자들을 지탄하는 것이 근거 없는 지탄인가? 아니다. 모두 역사적 근거를 가지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광복회장 김원웅은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가 친일·친나치 활동을 했다는 관련 자료를 독일 정부로부터 받았다”면서 “민족반역자가 작곡한 노래를 국가로 정한 나라는 전 세계에서 대한민국 한 나라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사단이 여호수아를 대적할 때 하나님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슥 3: 2).

하나님은 두 차례 걸쳐 사단을 책망했다. 그리고 이어서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을 표현한 것이다. 가슴 뭉클하게 만드는 이 말씀은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잘 표현해 준다.

바벨론 포로 생활은 풀무 불 같이 뜨거운 시련의 기간이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그 기간 동안에 불같은 시련을 견디다 못해 무슨 악행을 저질렀는지 우리가 알 수가 없지만, 일제시대에 우리 믿음의 선조들이 일제의 강압을 견디지 못해 일본 신사에 참배했던 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그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의 긍휼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바벨론 포로 생활을 ‘풀무’(겔 22: 22), 혹은 ‘고난의 풀무’(사 48: 10), ‘맹렬한 불’(렘 15: 14)로 보았다. 하나님의 긍휼은 여호수아의 부끄러운 행각을 비난하기 앞서 덮어 주시고 함께 아파하신다. 정죄하기보다 동정하시고 위로하신다. 몹쓸 사람으로 자르기보다 그래도 믿음 잃지 않고 견딘 것만으로도, 다 타버리지 않고 남아있는 것만으로도, 대견하게 여기시고 반겨 주신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호세아 11:8).

하나님의 구속사를 읽으면 그와 비교해서 우리가 쓰는 일반 역사가 얼마나 잔혹한지 알게 된다. 우리는 객관적으로 썼다고 말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하나님의 긍휼이 없다. 그래서, 가혹하다. 친일파들 걸러 낸 것이 다섯 차례나 되며 마지막엔 자그마치 5천명이 넘었다.

 

3. 다윗이 선택한 하나님의 긍휼

 

그래서, 가혹하고 잔혹한 인간의 역사, 인간의 손길을 잘 아는 다윗은 지혜로운 선택을 했다.

어느 날 다윗은 군대 장관 요압에게,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로 다니며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인구를 조사하여 그 도수를 내게 알게 하라”고 명을 내렸다(삼하 24: 2).

요압이 왕에게 반대 의견을 내 비쳤으나 왕의 명령이 수하 장군들을 재촉시켰다. 결국 이스라엘 전국을 돌아다니며 인구를 조사하였다. 그리고 다윗은 회개하였다.

하나님께서 선지자 갓을 통해 다윗에게 세 가지 재앙들 중에 하나를 선택하게 하셨다. 그가 선지자 갓에게, “내가 곤경에 있도다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크시니 우리가 여호와의 손에 빠지고 내가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않기를 원하노라”(삼하 24: 14)라고 대답 하였다.

그는 사람 손에 빠지면 긍휼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사람의 손길은 항상 날카롭고 잔혹하다. 그래서 그는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않고’ 대신 ‘여호와의 손’에 빠지길 원했다. 그는 매를 맞아도 사람 손에 맞는 것보다 하나님께 맞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혼내시려고 이웃 나라들 손에 매를 들려주실 때마다 앗수르나 바벨론 제국은 항상 잔인했다: “나는 조금만 노하였거늘 그들은 힘을 내어 고난을 더하였음이라”(슥 1: 15). 우리의 모습이다. 사람 손에 빠지기보다 하나님 손에 빠지길 원했던 다윗의 나라에 하나님께서 아침부터 정하신 때까지 전염병이 퍼지게 하셨다. 단부터 브엘세바까지 백성의 죽은 자가 칠만 명이나 되었다.

그런데, 과연 다윗의 판단은 적중하여, 천사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그 손을 들어 멸하려 할 때, 하나님께서 “이 재앙 내림을 뉘우치사 백성을 멸하는 천사에게 이르시되 족하다 이제는 네 손을 거두라”고 하셨다(삼하 24: 16).

긍휼이 크신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기대한 대로 차마 다윗의 도성 예루살렘을 치지 못하시고, 오히려 재앙 내리심을 뉘우치셨다. 사람 손에 빠지기보다 하나님 손에 빠지길 원했던 다윗의 판단은 적중했고 현명하였다.

 

 

4. 인간의 역사가 잔혹한 이유

 

일반 역사, 우리가 쓰는 역사가 가혹할 수 있는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살아보질 않았기 때문이다. 옛날 바벨론 포로 당시 조상들의 형편을 얘기 들어서 알긴 알지만 어설프게 안다. 그러나, 정확하게 모른다. 겪어 보지 않았기 때문에 내 잣대가 얼마나 가혹한지 가늠하지 못한 채 주관대로 판단한다.

이 점에서는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도 우리와 다르지 않았다. 당시 유대인들도 자신들의 조상이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 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의 선지자들을 배척했고 심지어 억울하게 죽이기까지 하였다. 부끄러운 노릇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조상들의 시대에 살았더라면 자신들은 조상들이 선지자들을 죽이는 데 동참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장담 했다. 자신들은 조상들처럼 불의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가로되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예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 됨을 스스로 증거함이로다 너희가 너희 조상의 양을 채우라”(마 23: 29-32).

우리도 같은 말을 한다. “만일, 우리가 일정시대 때에 살았으면 신사참배에 참여하지 않았을 거야”, “우리가 그 때 살았으면 친일 같은 짓은 안 했을 꺼야”, “우리가 그 때 살았으면 매국노 짓은 안 했을 거야, 오히려 독립 운동만 했을 거야.” 장담하면서 그 당시 친일 했던 사람들을 당당하게 판단하고 정죄한다.

이 점에서 우리는 모두 같다. 성경 읽다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찌나 우상 숭배를 많이 하고 하나님 배반을 열심히 하는지, “나 같으면 안 그랬을 텐데…” 그런 생각이 저절로 든다. 이것이 우리의 교만이다. 그래서, 우리는 교만하고 어리석다. 이 교만이 우리로 하여금 냉정하고 무자비하게 만든다.

그렇게 예수님 앞에서 큰 소리 치던 당시 사람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그 후 얼마 안돼서 선지자들보다 더 의롭고 위대하신 분, 우리의 구주 예수님이 빌라도 앞에서 재판을 받을 때, 제일 앞장 서서 큰 소리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소리쳤던 것이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은 또 다시 이루어진다. “너희가 너희 조상의 양을 채우라.”

친일파 명단 첫 발표가 2002년도에 있었다. 그러면, 해방 후 몇 년인가? 해방되고 57년만이다. 일정 시대가 끝나고 57년의 세월이 지난 후, 그 후손들이 57년 전 선진들의 친일 여부를 판단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그러므로, 친일파 명단을 만들 때마다 그 숫자가 점점 불어났다. 기준도 더 엄격해졌거니와, 시간이 가면 갈수록 점점 잔혹해질 수 있었다. 마지막 2009년도 발표할 때에는 5천명이 넘었다. 이것이 우리가 기록하는 역사다.

 

 

5. 하나님의 구속사적 관심들

 

허물 많은 대 제사장 여호수아를 보시면서 하나님은 감격하며 말씀하신다: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질문이 아니다. 감탄이다. 불같은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믿음 잃지 않은 것만으로도 대견스럽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감탄이다. 애처롭게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눈길, 얼마나 아팠을까 눈물을 글썽이며 동네 큰 아이들에게 매 맞고 퉁퉁 부은 눈으로 쭈그리고 들어 오는 어린 아들을 바라보는 엄마의 눈길 같은 하나님의 눈길…, 그 크신 긍휼의 눈길을 알아야 한다.

이 잔혹하고 가혹한 인간의 역사만 가지고는 부수고 허무는 사람의 일은 할 수 있어도 세우고 고치는 하나님의 일은 못한다. 긍휼이 없기 때문이다. 구속사를 알아야 하나님과 함께 일할 수 있다. 구속사를 아는 길은 기도하고 성령의 감동으로 성경을 읽는 것이다.

구속사의 첫 번 특징은 긍휼이다.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역사를 보자. 뜨거운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역사를 연구하고, 역사를 기록하고, 후대에 알리자.

구속사의 둘 째 특징은 세워주시는 것이다(슥 3: 4-5). 회개 시키고 아름다운 옷을 입혀 세워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다. 더러운 옷을 입었다고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옷을 벗기고 새 옷을 입혀 멋지게 세워주시는 것이 구속사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다. 그래서 여호수아가 멋지게 하나님 앞에 쓰임 받아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구속사다.

일꾼들을 세워주는 것이 구속의 일이다. 일 하도록 기회를 주는 것이 구속의 일이며, 하나님의 역사다. 교회는 일꾼들을 세워야 한다. 앞에 선 지도자들을 세워줘야 한다. 사단은 여호수아의 과거 떳떳하지 못했던 행적으로 그를 대적하기에 바빴다. 소위 말하는 ‘바른 소리’였다. 그러나, 그 바른 소리가 하나님을 격노케 하였다. 하나님의 책망은 두 번 연거푸 이어졌다.

 

 

6. 결론

 

이 글의 목적은 인간 역사의 비판이 아니고, 인간 역사와 하나님의 역사를 비교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그 부산물로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에는 크신 긍휼이 넘치는 것을 보지만, 인간의 역사에는 냉혹과 무자비함이 가득함도 보았다.

잘난 척 할 필요 없다. 성서는 우리 모두 죄인들이고 우리 모두 실수 많고 허물 많은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강력히 가르쳐 준다. 긍휼이 필요 없는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모두 긍휼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도 이웃을 긍휼히 여겨야 한다.

친일 논쟁에도 구속사적 관점, 하나님의 긍휼의 눈길이 필요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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