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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Posted by 크리스천 위클리 09/26/19
[특별기고] 한미동맹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약속과 맹세, 동맹에 관한 성서적 분석
이창기(독일 프랑크푸르트감리교회 담임목사)

주한미군 물러가라?

 

한미상호방위조약, 줄여서 한미동맹의 정식 명칭은 ‘대한민국과 미합중국 간의 상호방위조약’ (韓美相互防衛條約, Mutual Defence Treaty Between the Republic of Korea and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으로, 1953년 10월 1일 워싱턴 D.C.에서 변영태 외무장관과 덜레스 미 국무장관이 조인하였고, 1954년 11월 18일 정식 발효된 조약을 말한다.

그 주요 내용은 상호 방위, 즉 한국이 침략 당했을 때 미국이 도와주고 미국이 침략당했을 때 한국이 도와주는 것으로, 이 조약은 지금까지 유효하여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미리 방지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안보를 튼튼히 하여 경제 발전에도 크게 이바지하였다.

한미동맹이 이렇게 중요한 동맹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우리나라 안과 밖에서 미군 철수 주장과 한미동맹의 해체 요구를 심심치 않게 들을 수가 있다.

한미동맹은 우리나라 안보와 경제 발전에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은, 한미동맹에 대한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분석을 통해 이미 많은 이들이 역설해 왔다 (이 면에서는 서옥식 박사의 ‘한미동맹의 문제점 진단과 바람직한 방향’은 탁월한 논문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성서적, 신앙적인 면에서 한미동맹의 중요성을 분석하는 작업은 상대적으로 부족하였다. 이 글의 목적은 한미동맹의 중요성을 성서에 따른 분석을 통해 강조하기 위함이며, 이 글의 범위는 성서에 따른 분석에 한하며, 그 이외에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인 분석은 이 연구에서 제외되었다.


약속과 맹세의 엄중함

 

개인 간에 약속을 지킨다고 하는 것은 서로의 신뢰 구축을 위해 필요하다. 이 신뢰 구축은 한 사회를 건전하고 안전하게 지탱해 주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해준다. 그러므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느 민족, 어느 사회에서나 약속을 지킨다는 것은 가장 중요한 덕목들 중의 하나이다.

특별히 중대한 약속을 해야 할 땐 사람들이 맹세하게 되는데 맹세란 사전적인 의미로 “반드시 이룰 것을 굳게 다짐하는 것”을 말하며,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이행 의무를 위해 어떤 행위나 문서로 증빙한 약속을 말한다. 그러므로 맹세 역시 넓은 의미에서 약속에 속한다.

구체적으로 맹세하는 방법은 각 문화나 종족, 사회마다 달랐다. 고대 세계에서는 흔히 신들의 이름이나 신전(시 16 : 4, 암 8 : 14) 또는 하늘, 땅, 예루살렘, 심지어는 자기 머리(마 5 : 36)를 두고 맹세하기도 했다. 고대 헬라 사람들은 데메테르(Demeter)와 페르세포네(Persephone)의 신전에 들어가서 신성한 의식을 한 후에 여신의 자줏빛 망토를 입고 손에 횃불을 들고 맹세했다. 고대 로마인들은 황제의 이름으로 맹세를 하거나 돌 한 개를 손에 잡고, 만일 자신이 맹세를 어기면 이 돌과 같이 내던져지리라 서원하며 맹세했다.

구약 성서에서도 맹세는 엄중히 이행돼야 하는 것으로, 맹세를 위반하여 지키지 않는 것은 주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이고 (레 19 : 12), 마땅히 벌 받을 일이었다 (겔 17 : 13, 16, 18-19). 맹세는 그것이 비록 사람에게 해롭거나 (시 15 : 4), 무모한 것일지라도 반드시 지켜야 했다 (레 5 : 1-4). 구약 시대의 맹세는 상징적인 행위를 수반하였는데, 하늘을 향해 손을 들거나 (창 14 : 22, 신 32 : 4, 단 12 : 7, 계10: 5-6), 손을 족장의 ‘환도 뼈 밑’에 넣기도 하였다 (창 24 : 2, 47 : 29).

엄중함을 강조하는 맹세의 경우에는 동물을 둘로 쪼개고 그사이를 지나가며 맹세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것은 맹세를 어길 경우 그 동물과 같이 쪼갬을 당하게 될 것을 증거해 주는 것이다 (창 15 : 10, 17, 렘 34 : 18).

맹세를 나타내는 구약의 히브리어에는 두 단어가 있는데 일반적으로 ‘스부아’는 단순한 형식의 맹세를 가리킨다. 이 말은 신비한 숫자 7이라는 글자와 그 어근이 같다. 맹세 자는 7이라는 신비의 수와 관련을 맺는다 (브엘세바란 지명의 의미는 ‘일곱 우물’, 혹은 ‘맹세의 우물’이다; 창 21 : 22-31, 아랍인들은 계약을 맺을 때 7개의 돌에 피를 발랐다).

다른 하나는 구약에서 흔히 사용된 ‘알라’(헬라어로는 호르코스)로서 보통 ‘맹세’로 번역하지만, 그 정확한 뜻은 ‘저주’이며 (성서백과대사전 3권, p. 789), 맹세와 저주, 이 두 의미가 결합하여 쓰였다 {예: ‘저주의 맹세’ (민 5 : 21), ‘저주로 맹세’ (느 10 : 29), ‘맹세대로 된 저주’ (단 9 : 11) 등}. 그러므로 맹세는 그 맹세가 지켜지지 아니할 때 저주가 동반되는 것을 전제로 한 약속이다.

구약 시대의 맹세 혹은 약속은 반드시 지켜져야 했으며 그것을 지키지 아니했을 때는 저주를 받거나 둘로 쪼갬을 당하는 형벌을 전제로 했던 것임을 알 수가 있다. 그러므로 성서의 맹세란, 생명을 담보로 한 약속이다. 구약 시대의 약속이나 맹세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저주와 죽음을 전제로 한 엄중한 약속이었다.

 
서원의 엄중함: 무남독녀 외동 딸도 죽여야 하는….

 

그 한 대표적인 예가 바로 사사 입다의 이야기이다 (삿 11 : 29-40). 입다는 암몬 족속과의 전쟁에 나가면서 하나님께 서원하였다: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붙이시면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로 드리겠나이다” (30~31절).

그가 전쟁에 승리하고 돌아왔을 때 그 집 문에서 그를 영접한 사람은 다름 아닌 그의 무남독녀 외동딸이었다. 그는 자기의 서원한 바가 있어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슬프다. 내 딸이여 너는 나로 참담케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이로다.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 (35절) 탄식하였고 결국 자기의 외동딸을 번제로 드릴 수밖에 없었다 (39절).

사람을 번제로 드리는 잔혹성 때문에 종종 이 본문은 의심을 받아 왔고, 따라서 그 잔혹성을 완화하려는 해석이 시도되곤 하였다. 즉, 여기에 언급된 번제는 불에 태워서 바치는 제물이 아니라 ‘바쳐 올리는 제물’(ascending offering)을 의미하므로 입다의 딸은 번제로 바쳐진 것이 아니라 평생 처녀로 성소에서 봉사하는 여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을 태워 바치는 제물은 율법에 엄금되었기 때문이다 (레 18 : 21, 20: 2-5; 신 12 : 31, 18 : 10).

그런 해석의 또 다른 근거로, 당시 암몬 족속이 몰록 우상 (혹은 ’밀곰’, 왕상 11 : 5, 33)을 섬겼는데 (왕상 11 : 7), 자기 자녀들을 불살라 그 우상에게 바치는 악한 미신(迷信)에 젖어 있었고, 입다가 암몬을 대적하면서 그런 미신도 미워하지 않았겠느냐 하는 것이 그런 해석의 근거로 제시되곤 하였다.

그러나, 이 본문에 나타난 그 잔혹성은 오히려 서원, 혹은 맹세의 엄중함을 더욱 두드러지게 할 뿐이다. 서원이나 맹세는 지키지 않을 수 없다. 한 사람의 서원은 비록 무남독녀 외동딸이라도 번제로 드릴 수밖에 없음을 본문은 더욱 확증해 준다. 그 엄중함은 입다의 탄식과 그의 딸, 그리고 이스라엘 여인들의 애곡에 잘 나타난다. 입다는 탄식하기를 “슬프다. 내 딸이여 너는 나로 참담케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이로다” (35절) 하였고, 그의 딸은 탄식하기를, “이 일만 내게 허락하사 나를 두 달만 용납하소서 내가 나의 동무들과 함께 산에 올라가서 나의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겠나이다” (37절) 하였고, 이스라엘 여인들은 “이스라엘 여자들이 해마다 가서 ?길르앗 사람 입다의 딸을 위하여 나흘씩 애곡” (40절) 한다고 하였다.

만약 이러한 탄식이 단순히 그의 딸이 성소에서 평생 처녀로 살게 됨을 탄식한 것이라고 해석하기에는 본문이 너무나 과장되다. 평생 처녀로 살게 됨을 이렇게 애절하게 탄식할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본문의 애끓는 탄식은 입다가 자기 딸을 서원을 지키기 위해 번제로 드렸다는 것을 전제로 하지 않고는 설명할 수가 없다. 서약은 외동딸도 번제로 드려야 할 만큼 엄중한 것이었다.

 
동맹의 엄중함: 잘못 맺은 동맹도 지켜야 하는….


여호수아 10 : 9-14는 특이하고 놀라운 사실을 전해준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신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성도들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것과는 의미가 다르다. 14절은 이렇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신 이 같은 날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셨음이니라”. 즉, 이 같은 날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의 목소리를 듣고 태양을 멈추게 한 것, 사람의 목소리를 직접 들으신 것은 역사에 다시 반복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겼는가? 전쟁이 벌어졌다. 여호수아의 이스라엘 군대는 기브온 사람들을 도와 아모리 다섯 왕의 연합군과 전쟁을 벌였다. 그렇다면 여호수아의 이스라엘 군대는 왜, 어떻게 하다가 기브온 사람들과 손을 잡게 되었나? 여기에 기막힌 사연이 있다.

기브온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아니었다. 이스라엘의 원수요, 대적이었다. 싸워야 할 상대였고 정복해야 할 상대였다. 그러면 어쩌다 기브온 사람들과 손을 잡게 되었나? 여호수아가 속은 것이다. 사기를 당하고 기만을 당했다. 그들은 마치 멀리서 온 사람들처럼 가장하고 낡은 옷에 곰팡이 슨 빵을 들고 나타났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얼떨결에 그들과 함께 불가침 평화 조약을 맺어 버렸다. 여호수아의 실수가 분명하다. 성경에는 그가 하나님께 묻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수 9 : 14).

그 결과, 나중에 속은 줄 알고 난 백성들이 족장들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수 10 : 18). 사기당해 맺은 조약이기에 그것을 빌미로 무효화시켰을까? 만약 그렇게 했다면 백성들이 좋아했을 것이다. 여호수아는 사기당해 맺은 그 조약도 충실히 지켰다. 그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바로 그들이 그 조약을 지키지 않을 경우, “우리가 그들에게 맹세한 맹약을 인하여 진노가 우리에게 임할까” (수 9 : 20) 하는 것이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약을 지키지 아니하면 저주와 진노가 임하는 줄 알고 있었다.

아모리 다섯 왕이 기브온을 공격하자 기브온 사람들은 그 조약을 근거로 여호수아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여호수아는 사기로 맺은 조약이라도 그 약속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여호수아는 군사들을 동원해서 기브온 사람들을 도우러 갔다. 밤새도록 험한 산지를 뚫고 (수 10 : 17) 길갈에서 기브온까지 약 40km 거리를 행군하여 나아갔다. 적군 가나안 동맹군들이 전혀 예상치 못하고 방심하고 있을 때, 여호수아는 기습했고 큰 승리를 거두었다.

본문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반응하셨는가?’ 하는 것이다. 성경에는 여호수아가 기브온 사람들과 평화 조약 맺으러 왔을 때, 여호와 하나님께 묻지 않았다고 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여호수아가 속아서 조약을 맺었던 것이지 하나님께서 그 조약 맺으라고 허락하셨던 것은 아니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 묻지 않고 결정한 것이니까 하나님께는 책임이 없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나 몰라라 하실 수 있는 장면이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반응하셨을까? 모르는 척하셨을까? 네가 조약을 맺었으니 네가 알아서 해라! 그러실 수도 있었을 것이다. 놀라운 장면이다. 여호수아가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최선 다할 때, 하나님께서도 크게 기뻐하셨다. 이것은 마치 “네가 싸인 것이 바로 내가 사인 한 것과 같은 것이야!”라고 말씀하시는 듯했다.

싸우러 올라가는 여호수아에게 나타나셔서 오히려 격려해 주셨다: “그들을 두려워 말라 내가 그들을 네 손에 붙였으니 그들의 한 사람도 너를 당할 자 없으리라” (수 10 : 8). 그뿐만 아니라 큰 덩이 우박을 아세가에 이르기까지 쏟아부으셔서 여호수아의 이스라엘군을 도와주셨다 (11절).

그뿐만 아니라, 여호수아가 태양을 멈추도록 명령하자 하나님께서 즉시 그의 입의 말을 들어주셨다. 태양을 붙잡고 계신 것이다. 그런 적이 없었다.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무엇을 말하는가? 하나님께서 단순히 기뻐하신 것이 아니라 도우시되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도와주셨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나 당신의 종들이 이 땅에서 맺은 언약을 마치 당신이 맺은 것처럼 간주해 주셨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마 18:18). 우리가 한 약속은 우리만의 약속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신 약속이다. 이 약속을 지킬 때 우리의 약속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하신 약속을 지키는 것이다.

당신의 종 여호수아의 목소리를 듣고 태양을 붙잡고 계신 하나님, 이 극적인 장면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유리하거나 불리하거나 불문하고 우리가 그 약속을 성실히 지킬 때 성실하신 하나님께서도 얼마나 기뻐하시고 얼마나 적극적으로 우리를 도와주시는지를 잘 보게 된다.

 

언약의 엄중함: 하나님도 지키셔야 하는….

 

하나님께서 여호수아가기브온과 맺은 조약에 따라 약속 지키려 할 때 적극적으로 개입하시면서 도우셨던 것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을 짐작할 수가 있다. 약속은 내게 유리하든 불리하든 그것 따지지 않고 지키기를 하나님께서 원하신다. 사실은 하나님 자신도 우리에게 한 약속을 그렇게 틀림없이 지키시는 것이다. 약속을 잘 지키는 것이 신실이다. 하나님은 약속을 충실히 지키시는 신실하신 분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 주시겠다 약속하시고 그 약속 지키셨다. 메시야 보내 주실 것을 약속하시고 예수 그리스도 보내 주셨다. 그가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해 주시리라 약속하셨고 그 약속 지키기 위해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대신 속죄의 피를 흘려 주셨다. 그 독생 성자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가라사대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막 14 : 24].

‘언약의 피’란 무슨 뜻인가? 두 가지 뜻이 포함돼 있다: 첫째,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신 속죄의 피란 뜻이다. 하나님께서 옛 선지자들로 예언하신 말씀을 주님께서 이루셨다는 말이다. 약속하시고 그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둘째, 이미 살펴본 대로, 구약 시대에 언약을 맺을 때 짐승을 잡아 둘로 쪼개고 그사이를 당사자가 팔짱을 끼고 지나가며 약속을 맺었다. 이 약속을 깨면 우리 몸도 둘로 쪼개라는 뜻이다. 십자가 위에서 형벌 당하신 예수는 하나님과 우리 인류 사이에 놓인 희생 제물이시다. 그는 모든 언약의 근거가 된다. 그 근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사하시지 아니하실 수가 없다. 주님의 십자가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약속하신 것, 즉, 영원한 나라와 그 기업을 약속의 자녀들에게 주시지 아니하실 수가 없다. 우리 기도를 들어주시고 우리를 지켜 주시지 아니하실 수가 없다. 약속 이행에 충실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의 흘리신 피는 언약의 피, 지극히 보배로운 피가 된다.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을 잘 살펴보면 저희에게 큰 은혜가 된다 (창 12 : 1-4). 이 구절을 이해하기 쉽게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 보자: 친구들 사이에 멍청이로 소문난 ‘찐따’라는 학생이 있었다.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맨날 놀림당하였고, 무시당했고, 골탕먹었다. 반에 ‘일진’이란 학생도 있었다. ‘일진’이 ‘찐따’를 많이 괴롭혔다. 어느 날 그 반에 ‘범생’이란 한 학생이 전학 왔다. 잘 생겼고, 덩치도 크고, 공부도 잘하고 태권도를 배웠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새로 온 ‘범생’이 ‘찐따’에게 다가가서 우리 친구 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그래서 ‘절친’ 혹은 ‘베푸’가 됐다. 그다음부터 그 반에서 누구도 ‘찐따’를 건드리지 못한다. 왜? 덩치 크고 공부도 잘하고 태권도까지 배운 ‘범생’이 ‘찐따’의 ‘절친’이요, ‘베푸’이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의 본문은 창세기 12장이다. ‘찐따’는 아브라함이고, ‘일진’은 가나안 족속들이다. ‘범생’은 누굴까? 하나님이시다. 창세기 12 : 3절은 이렇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이것은 아브라함과 하나님이 친구 맺는 장면이다. ‘절친’ 되는 것을 말한다. 쉽게 말하면, “내가 네 편 들어 줄 거야. 내가 힘들면 네가 날 도와주고 네가 힘들면 내가 널 도와줄게. 우리 약속해…..” 온 우주 공간에 가장 힘 있는 분,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을 ‘절친’ 삼는 것처럼 기분 좋은 일이 어디 있을까? 그런 감격이 또 어디 있을까? 이것이 아브라함의 이야기이고,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약속의 자녀 된 그의 후손들의 이야기요, 오늘날 성도들의 이야기이다.

예수의 십자가 피로 하나님과 인류 사이에 언약이 맺어졌다. ‘절친’이 된 것이다. 절친이란 무엇인가? 도움이 필요할 때 서로 돕기로 약속한 것을 말한다. 싸움이 벌어지거나 전쟁이 터지면 서로 돕기로 약속한 것이다. 쉽게 말하면, ‘한 편’이 된 것이다. “내가 누구에게 공격받으면 네가 날 도와줘. 누가 널 공격하면 내가 널 도와줄게.” 그런 뜻이다. 하나의 동맹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믿음 없는 자기 백성들을 위해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언약을 맺으셨다. 그것이 무엇인가? 맹세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맹세하셨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음으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힙 6 : 13-14) 말씀하셨다.

원래 맹세는 자기보다 큰 자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법이다 (16절).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이름을 두고 맹세할 수 있는 자기보다 더 큰 자의 이름을 찾지 못하셨다. 그래서, ‘자기를 가리켜’ (13절) 자기 이름으로 맹세를 하신 것이다. 맹세를 당신 이름을 두고 맹세하시다니……? 우리 하나님의 우주적인 코미디지만, 우리에겐 넘치는 은혜의 코미디요, 구원의 코미디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나님의 맹세는 변할 수 없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17절). 또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나님의 맹세는 거짓될 수가 없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18절). 하나님의 맹세는 그러므로 “저희 모든 다투는 일에 최후 확정” (16절) 이 된다. 하나님의 맹세는 모든 논쟁과 모든 다툼의 가장 마지막 확정이 된다. 마치 대법원의 최후 판결같이 마지막 확정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맹세를 믿을 수가 있다: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18절).

주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은 맹세로 주신 약속이며, 따라서 변할 수 없고 거짓될 수 없는 두 가지 사실이 우리에게 큰 믿음과 소망, 놀라운 안위를 주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 (19절) 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도 지킬 수밖에 없는 맹세, 그 맹세로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로 약속하셨다. 그 하나님의 맹세는 하나님 편에서 보면 일방적인 희생이요 손해지만, 우리 인류에겐 일방적인 헤아릴 수 없는 은혜요, 넘치는 구원이 된다.

 

한미방위조약의 엄중함: 우리도 지켜야 하는…..

 

한국인들에게는 너무나 좋은 예가 있어 이러한 성서 이해를 크게 도와준다. 바로 한미방위조약이다. 미국과 우리 대한민국과 맺은 조약이다. 한미상호방위조약 제2조는 이렇게 돼 있다: “제2조 당사국 중 어느 1국의 정치적 독립 또는 안전이 외부로부터의 무력 공격에 의하여 위협을 받고 있다고 어느 당사국이든지 인정할 때에는 언제든지 당사국은 서로 협의한다. 당사국은 단독적으로나 공동으로나 자조(自助)와 상호 원조에 의하여 무력 공격을 저지하기 위한 적절한 수단을 지속 강화할 것이며 본 조약을 이행하고 그 목적을 추진할 적절한 조치를 협의와 합의로 취할 것이다.”

쉽게 말하면, 한국이 공격받으면 미국이 돕고 미국이 공격받으면 한국이 돕기로 약속한 것이다. 한 마디로 친구가 된 것이다. ‘절친’이 된 것이다. 편들어 주기로 약속한 것이다. 이것은 여호수아와 기브온 사람들 사이에 체결했던 조약과 같은 성격의 것이다.

한미방위조약을 맺을 당시, 고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 프린스턴 대학에서 국제정치학을 공부한 당대의 엘리트로서 한반도 정세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분이었다. 대한민국 주변에는 상대하기 힘든 강대국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북한의 김일성, 일본, 중국, 소련, 등 만만한 상대는 하나도 없었다. 불안하기 짝이 없었으며, 대한민국은 그에 비해 약하고 외로웠다. 아시아의 ‘찐따’였다. 부인하고 싶지만, 그것이 현실이었다. 그래서 미국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제발 우리 친구 하자고…..

미국은 지금이나 그때나 세계 최강국이다. 미국은 당시 아쉬운 것이 없었다. 오히려 대한민국이 아쉬웠다. 그래서 고 이승만 대통령은 한 편으론,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무리수를 두어 미국을 겁박하면서, 다른 한 편, 마치 모든 자존심 접고 여호수아 장군을 찾아갔던 기브온 사람들처럼 미국에 애걸하면서 한미방위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렇게 간신히 맺은 방위 조약 덕분에 북한도 함부로 남한을 공격하지 못했고, 일본도 함부로 독도를 건드리지 못했다. 중국도 옛 소련도 대한민국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그동안 대한민국은 무서운 속도로 경제를 발전시켰다. 고 이승만 대통령의 예측은 적중하였고, 후손들이 큰 덕을 보게 되었다.

한미방위 조약으로 대한민국이 일방적으로 미국에 도움을 받는 형편이었다. 그러다가 대한민국이 미국을 도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 미국이 월남 전쟁에 휩쓸린 것이다. 세계적인 여론이 미국의 월남전 참전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미국 국내의 반전 여론도 거세었다. 미국 정부로서는 속히 끝내고 싶은 전쟁이었다. 그러나 쉽게 발을 뺄 수도 없었다. 미국은 우리의 도움이 아쉬웠다. 그때 한미 상호 방위 조약을 근거로 1964년 9월 11일 대한민국 국군들이 월남에 가서 미국 도와 참전하게 되었다. 그 후 8년간 총 31만 2천853명(최대 5만 명)의 국군 병력이 파견되었고 5,099명의 사망자와 11,232명의 부상자가 나왔으며, 159,132명의 고엽제 피해자가 발생했다.

대한민국은 피 흘려 약속을 지켰다. 말로만 아니라 피 흘려 생명 바쳐 한미방위조약을 실천했다. 당시 미국 존슨 대통령 (Lyndon B. Johnson, 1908-1973)과 미국 국민은 월남 파병에 크게 고마워했다. 우리나라와 미국은 그러므로 글자 그대로 피 흘려 약속을 지켜 낸 ‘혈맹’이 되었다. 한미방위조약은 월남파병과 함께 미국과 대한민국을 이렇게 ‘혈맹’으로 다시금 견고하고 튼튼하게 묶어주는 끈이 되었다.

그 후 월남 파병을 시발점으로, 대한민국은 국력이 신장하면서 유엔의 요청에 따라 해외에 군대를 파견하여 자유 우방국들과 함께 세계 평화 유지에 크게 이바지하는 나라가 되었다. 현재 소말리아, 레바논, 아랍 에미레이트, 남수단 등 10여 곳에 1,100여 명의 국군들이 파견되어 복무하고 있다.

우리가 약속 지킬 때 미국 국민과 미국의 대통령 존슨만 좋아했던 것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하늘의 하나님께서 기뻐하셨다는 것이다. 비록 우리 사람들끼리 했던 약속, 나라끼리 했던 약속이지만, 성실히 지킬 때 하나님 기뻐하신다고 하는 것, 이것을 잊으면 안 될 것이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마 18:18).

 

결론: 앞으로는….

 

결론적으로 말해, 약속과 맹세, 조약이나 동맹은 일방적으로 약자에게 유리한 것이다: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연약 관계에서 유리한 것은 전적으로 아브라함이었다. 그 유리함을 성서는 ‘복’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여호수아의 이스라엘과 기브온 족속 간의 평화 조약은 약자였던 기브온 사람들에게 전적으로 유리하였다. 도움을 크게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하나님과 성도들 간에 맺어진 기독교 신앙의 관계는 전적으로, 절대적으로 성도들에게 유리한 것이다. 성도들은 그 주님을 믿기만 하면 말할 수 없이 크고 놀라운 기업을 받기로 약속돼 있다. 이것을 성서는 큰 ‘은혜’요, ‘구원’이요, ‘영생’이라고 표현한다.

한미동맹은 전적으로 약자인 대한민국에 유리한 조약이다. 이 동맹이 있는 한, 우리 대한민국은 마치 힘센 황소의 고삐를 잡고 있는 어린 소년과 같다. 대한민국은 마치 황소 고삐를 잡듯이 이 조약을 근거로 강대국 미국을 향해 당당하게 조약 이행을 요구할 수가 있다. 기독교 신앙 위에 세워진 미국, 기독교 인구가 75% (2015 현재)에 이르는 미국은 이 동맹 관계를 지킬 의무를 지고 있으며 성실히 지킬 것이다. 이 동맹에 따라 미국은 마땅히 대한민국의 안보와 외교에 최대한 도움을 주어야 한다. 이 ‘고삐’를 놓치지 않는 한…..

앞으로, 대한민국은 다음 세 가지를 명심하고 지켜야 한다:

첫째, 대한민국은 하나님 앞에서 그 조약을 성실히 지켜야 한다. 대한민국이 그렇게 하도록 교회는 앞장서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약속 지키는 사람이나 국가를 크게 기뻐하셨고 도우셨다. 그럴 뿐만 아니라 하나님 스스로 약속을 성실히 지키시는 분이심을 우리에게 나타내 주셨다. 한국 교회는 그 하나님을 믿기에 한미조약을 성실히 지키는 데 앞장서야 할 것이다.

둘째, 대한민국은 미국에게 한미방위조약 이행을 당당히 요구해야 한다. 대한민국은 일찍이 월남전에 참전하여 많은 젊은이가 피 흘리고 생명 바쳐 미국과 혈맹이 되었다. 미국은 조약에 따라 혈맹인 대한민국을 세계 어느 나라보다 최우선으로 도와야 한다. 한미방위조약은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주신 미국의 ‘고삐’다. 놓쳐서는 안 된다.

셋째, 그러므로, 대한민국은 한미동맹 해체를 막아야 한다. 한미동맹은 특별히 약자인 대한민국에 유리한 동맹이다. 강대국 미국에 필요하다기보다 약자인 대한민국에 더 필요한 동맹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동맹의 해체를 막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자존심을 누르며 한미 상호조방위약을 요구했던 (사실은 구걸이나 다름없었음) 고 이승만 대통령의 노고, 그리고 미국 카터 대통령의 집요한 미군 철수 시도 앞에 굴욕감을 참으며 막아냈던 고 박정희 대통령의 희생에 깊은 경의를 표하며 이 모든 은혜를 우리 대한민국에 베풀어 주신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 나라 만세!” (애국가 중에서)

 

 

이창기 목사 약력 및 연락처

1952년 강원도 화천 출생

목원대학교 신학과 졸업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졸업

네덜란드 위트레흐트 대학교 Ph.D. 취득

군목출신 (예비역 육군대위)

네덜란드 로테르담한글학교 교장

네덜란드 헤이그이준기념교회 담임

(현) 독일 프랑크푸르트감리교회 담임목사

주소: Kaiser-Sigmund-Str. 50, 60320 Frankfurt am Main, Germany

전화: (0049)-(0)69-9459 8008

이 메일: haguelee@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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